샬롬문화 시리즈 10
나는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의 사진 혹은 미술 작품 전시회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작품들이 주는 즐거움이나 만족감 보다는 실망과 안타까움을 안고 돌아설 때가 더 많다.
왜 그럴까 생각해 왔는데, 프랑스의 예술가인 장 바젠느에게서 그 해답을 얻었다.
“오늘날의 화가들은 자신의 순수한 감정의 율동과 은밀한 심장의 박동을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시키는 일이 없이 그림을 그리고저 하는 유혹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단지 일종의 추상적 표현주의로 귀착되어 마침내 단조로움과 형태의 빈곤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인간을 그의 세계와 조화 시킬 수 있는 형태는 ‘영적교류(靈的交流)의 예술(藝術)’이며 이로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아직 형체를 이루지 못한 그 자신의 용모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영적교류의 느낌이 있어야 영원한 가치가 있듯이 시한적인 세계에서 무한대한 영원을 향해 준비하고 있는 우리의 노년기도 더욱 승화된 육체적, 정신적인 나눔의 세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어떤 신학자는 노년이 될수록 삼위일체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줄수록 본래의 자기를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의 영교(靈交)에 참여함으로서 그 노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에도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년의 원천적인 고독을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서를 쓴 성자 누가의 상징적인 그림을 보면, 꼭 노년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세계와
영원을 일치하려는 그의 간구하는 원형이, 사방으로 원을 만들어 그의 자비(의사로서의)와
그의 사랑(신앙인으로서의)이 일치하며 영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며,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인 누가 복음의 저자인 누가의 동심이 잘 들어나는 색동옷 단 끝에 달린 사랑(heart모양)의 옷 술들이 노년의 우리에게 나눔의 공동체를 통해 기쁨을 맛 볼 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웃에게 우리의 사랑을 선사하도록 암시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정보화 사회와 복지사회가 펼쳐질 새천년에, 세월이 더 할수록 듬뿍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가질 때, 우리의 은빛 계절은 더욱 풍성한 열매로 빛나게 되리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 이전에 황소가면을 쓴 디오니서스의 축제처럼, 우리도 황소의 상징인 누가 성인과 함께 사랑과 자비의 나눔 축제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글/ Yunice 경남 <샬롬문화> 2000. 봄호
그림/ 황소로 상징되는 누가 복음서의 저자 누가의 자비로운 모습/
920년 경 성서 필사본 삽화로 프랑스 레옹성당에 소장/ 조광호 신부님제공
(월간 들숨날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