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음악
2004.11.15 06:5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金光圭

조회 수 1074 추천 수 0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金 光 圭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5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編輯者의 蛇足=이詩는 419世代인 金光圭시인이 4,19후 18년이 지난 1978년 不惑(40대)
초입시절 文藝季刊誌 <文學과 知性>에 발표한 것으로 詩를 발표한지 벌써 26년의 歲月이
흘렀고 金光圭시인도 이제는 耳順(60대)의 끝머리, 詩壇서는 重鎭 元老의 연배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희미한 옛기억의 저편으로 살아질 세월이 흐른뒤
옛詩를 되새김질하는 感懷는 4.19를 체험한 世代만이 느끼는 哀傷인가.


*흐르는 배경 음악은 Los Tres Diamantes가 부르는 Luna Llena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詩의 제목과 배경음악의 제목이 같아 더욱 감회가 깊다..

203.228.173.65 김용원: 늘 좋은글과 사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1/16-09:19]
203.228.173.65 김용원: 늘 좋은글과 사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1/16-09:20]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16 그림과 음악 古 風 衣 裳 / 趙 芝 薰 오도광 2004.09.25 936
615 그림과 음악 또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 설경옥 오도광 2004.04.20 1188
614 음악감상실 "Amazing Grace" 모음 4 관리자 2002.06.21 2532
613 음악감상실 "Amazing Grace" 모음(2) 3 관리자 2002.08.31 2490
612 음악감상실 "Amazing Grace" 모음(3) 5 관리자 2002.08.31 2190
611 음악감상실 "Gloria" 모음 1 관리자 2002.06.17 1995
610 음악감상실 "Voices from the Holy Land" 관리자 2002.06.04 2028
609 그림과 음악 ...하세요 관리자 2004.07.16 867
608 책과글 01_유니스의 지구촌여행기 / 꼬스코, 페루의 한가운데 윤경남(국제펜클럽 회원) 2010.01.14 1558
607 책과글 02_유니스의 지구촌여행기 / 잉카왕국이 탄생한 티티카카 호수 윤경남 2010.01.14 1651
606 책과글 03_유니스의 지구촌 여행기 / 구름과 비의 도시 마추피추 윤경남 2010.01.15 1571
605 책과글 04_유니스의 지구촌 여행 / 적송나무가 서 있는 양가누꼬 호수 윤경남 2010.01.18 1446
604 책과글 05_유니스의 지구촌여행기 / ‘섹시우먼’과 잉카리의 신화 윤경남 2010.01.18 1311
603 책과글 06_유니스의 지구촌여행 / 인도네시아 발리의 새벽 윤경남 2010.01.19 1567
602 책과글 08_유니스의 지구촌여행 / 발리의 목공예마을 MAS 윤경남 2010.01.20 1569
601 책과글 1.알함브라궁의 영혼의 산책_Walking along with my Soul in the Alhambra Palace 윤경남 2009.04.09 1342
600 책과글 10. 빌바오 부둣가의 구겐하임 미술관_Bilbao Guggenheim Museo Yunice Min 2009.04.09 1352
599 책과글 11.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신비_The Mystic of Santiago de Compostela 윤경남 2009.04.09 1529
598 책과글 12. 제3의성지 산티아고로 가는 길_Camino de Santiago file Yunice Min 2009.04.09 1412
597 책과글 13. 파리의 세에느 강변을 걸으며_Riverside of the Seine Yunice경남 2009.04.09 131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