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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사랑방개편작업중 날아가 버린 글중 기록으로 남겨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것을 복원하여 올립니다> 擔任牧師宅門牌 友鏡山房에 관하여 兪璟在목사님댁을 방문한 교우는 1층정문현관에 友鏡山房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문패를 보셨을것임니다. 문패따위를 눈여겨 보지 않는 분들도 있을테지만 눈여겨보신분은 문패에 써있는 友鏡山房이란 것이 요즈음세태나 풍조와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어서 고개를 갸우뚱하셨을지도 모르겠고 무슨 사연이 들어있지 않을까 궁금하셨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요즈음 그러한 집들은 대개는 △△빌라, △△맨션과 같은 이름을 아주 큼지막하게 부치고 빌라니 맨션이니 하는 외래어앞에도 프랑스어나 영어를 올려 잔뜩 멋을 부리기 마련인데 두메산골의 외진 산비탈의 퇴락한 집에나 내걸 한문이름의 문패가 걸려 있으니까요. 궁금히 여기실런지도 모르는 교우를 위해 友鏡山房의 내력과 얽힌 얘기를 적어보겠습니다. 友鏡山房이란 지금의 집이 지어지기전 그 자리에 있던 저희집의 堂號였습니다. 전에 있던 집은 1930년대 저희 아버님(吳鳳彬)께서 가회동36번지 초가집을 매입하시여 그곳에 양옥2층을 지으시고 堂號를 友鏡山房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友鏡은 바로 아버님의 雅號였고요. 1930년대 저희집은 아직도 한옥이 많이 남아있는 그골목에서는 제법 번듯하게 돋보이는 양옥2층이었는데 아버님께서 자신의 아호인 友鏡에 山房이란 단어를 덧부쳐 堂號를 삼으셨던 것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곳은 주택이 별로 들어서지 않았고 얕으막한 동산이어서 山房이란 용어를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옛어른들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名(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하여 號를 짓고 주변사람들과 어울릴 때 서로 허물없이 불렀고 이것을 雅號라고 했지요. 아호외에 거처하는 주택의 이름도 지어 堂號라고 하였읍니다. 아버님이 당호를 友鏡山房이라고 정하자 己未(3.1)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대표33인중의 한분이자 金石學의 대가이며 당대의 명필인 葦滄 吳世昌선생께서 隸書體로 友鏡山房을 휘호하여 아버님께 보내셨고 아버님은 가문의 어른으로 모셨던 葦滄선생의 隸書橫額을 응접실에 걸어두고 방문객들에게 자랑하셨지요. 망국한의 시대에 흥사단을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자주사상을 고취시킨 민족지도자 島山 安昌浩선생께서도 서대문형무소서 옥고를 치르시고 출옥하신 얼마뒤 友鏡山房에 친히 내방하시여 당시의 흥사단간부들과 회동하셨으며 그사진은 島山傳記에 수록되는등 암울했던 1930년대 식민치하에서 友鏡山房은 지도층의 인사들이 자주 모여 울분을 되씹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전란의 소용돌이속에서 아버님이 납북되신 이후 어머님(金周明권사)은 죄없이 끌려가신 아버님은 주님의 보호속에서 반듯이 풀려나 돌아오실 것이라고 확신하시며 友鏡山房을 떠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애타는 기다림속에서 友鏡山房을 37년동안이나 지키시다 애타는 기다림의 보람도 없이 돌아가신 어머님은 헤어짐도 없고 기다림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아버님과 재회하셔서 영생을 누리고 계시겠지요. 저희집의 家寶라고도 할수 있는 友鏡山房횡액은 전란의 와중에서 분실되고 말았습니다. 분실된 횡액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葦滄선생의 휘호가 워낙 출중한 명필이어서 안목있는 한국화가에 의해 수집되어 그의 집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었읍니다. 청계천의 어느고물상에서 葦滄揮毫의 友鏡山房횡액을 매입한 그 한국화가는 유명한 여자대학교 한국화교수인 화단의 중진이었으며 감리교단의 한교회에서 장로직분을 맡고 있었는데 횡액을 구입한후에는 내력도 모르는 채로 스스로 자신의 자택 당호를 友鏡山房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 서예가의 소개로 그동양화가를 만나보고 서로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으나 그동양화가가 횡액을 돌려주거나 전매할 의향을 보이지 않아 횡액의 회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葦滄의 필적을 찾아냈다는 이유만으로 내용도 모르고 友鏡山房이라는 당호를 함부로 쓰는것만은 자제해 주웠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가회동 집을 지키신 자세가 望夫石과 같이 느껴져 저나름대로 가회동집은 友鏡山房이라기 보다 차라리 北村望夫亭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기명칼럼을 연재할때에 北村望夫亭事緣이란 제목으로 아버님을 기다리시며 이사도 안가고 37년을 버티신 어머님과 우리가족의 얘기를 털어놓으며 이산가족들이 남몰래 앓아온 아픔을 전했더니 여러사람이 감명깊게 읽었다는 말을 전해오더군요. 비슷한 내용을 北村殘留辯이란 수필에 담아 잡지에 발표했을때에도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저희가족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7~8년을 더 가회동집에서 살아 漢陽定都6백년을 맞아서 저는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서울토박이로 지정받기도 했으나 그얼마후 一山으로 난생처음 이사를 갔고 2년쯤뒤에는 낡은 가회동집을 허물고 그터에 지금의 새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공될 무렵 집이름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건축업자가 묻더군요. 저는 즉석에서 서슴없이 60년도 더 전에 아버님이 지으신 堂號 友鏡山房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한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관훈동의 목공소에 알아보니 葦滄선생의 필적이 작은 사진으로라도 남아있으면 복원이 가능하다고 하길래 사진첩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葦滄선생의 友鏡山房휘호필적이 담긴 사진을 찾지못해 葦滄휘호의 복원은 포기한 채로 보기 좋은 隸書體로 友鏡山房이란 문패를 달았습니다. 門牌로는 크고 懸板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지만 저와 저희가족에게는 의미가 담긴 堂號입니다. 설익은 외래어가 넘쳐흐르는 세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지만 兪璟在목사님도 『운치가 있는데요』하시더군요. 安洞敎會하면 요즈음도 北村양반교회라고 하는데 양반교회담임목사댁이 들어있는 집이 고풍어린 당호를 내걸었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당호의 내력이나 사연을 교우여러분에게 털어 놓는것도 전연 무의미아하지는 않겠지요. 기왕에 얘기를 꺼낸 김에 제가 수년전에 썼던 북촌망부정사연도 뒤이어 소개해볼까 합니다. 어버이날을 보내자니 민족의 비극을 그한가운데서 가장 아프고 모질게 겪으신 부모님이 회상되어 지금쯤엔 헤어짐과 그리움이 없는 그곳에서 안식하실 두분께 올리는 글이라는 마음으로 올리는것입니다. 교우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北村望夫亭事緣은 얼마전 개설한 고교동기동창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손질한 것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北村望夫亭 事緣 吳 道 光 오죽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겠느냐는 핀잔을 받기에 알맞겠지만 1.4후퇴때의 釜山避難時節 2년9개월(1950년12월~1953년8월)을 빼고는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그대로 눌러 살고 있다. 번지까지야 밝힐 필요가 없겠지만 서울特別市鍾路區嘉會洞, 그 옛날에는 살기가 좋아 朝廷의 權門勢道家들이 代를 이어 살았고 서울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首都서울서 가장 살기 좋았다는 北村서도 노른 자위로 불린 지역이었지만 제대로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말하기 좋아 하고 목청 큰 사람들의 말만 듣고, 묶어 놓은 韓屋保存地區에 들어 있어 지금은 붐타운 江南에 저만치 밀려버린 江北에서도 가장 후진채로 도심의 낙후지역으로 남아있는 동네다. 주거생활의 첨단문화공간이라는 아파트와는 등진채 달동네나 다름없이 후진 동네에서 60년 가까히 사는 것도 러시아워가 따로 없이 온종일 게속되는 그 지독한 교통지옥에 전혀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관청등에 제출하는 각종민원서류의 인적사항란에 본적 출생지 현주소를 일일히 챙기지 않고 하나로 적으면 그만이어서 편리한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직하게 한 집에 평생을 눌러 지낸 것은 나의 별난 옹고집이 아니라 어머님의 恨때문이었다. 6.25전란때 북한군에게 납북당하신 아버님을 기다리시던 어머님은 『아무 죄도 없이 무고하게 끌려 가신 아버님이 어느 때건 저들에게서 풀려나 돌아오실 텐데 우리가 집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어야지 이사하고 없으면 아버님이 어떻게 옛집을 찾으실수 있을 것이며 집에 돌아 오셔서 반기는 가족이 없으면 얼마나 섭섭하시겠느냐』하시면서 집 옮기기를 꺼리셨다. 납북당하신 아버님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그리시는 어머님의 그 애절한 恨을 굳이 거스릴 만한 용기가 내게는 없어서 그대로 지내다 보니 남들은 부동산경기를 따라 江南으로 모두 떠났는데도 바보스럽게 北村에 그대로 남고야 말았다. 언젠가 이같은 사연을 「北村殘留辯」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에 담으면서 살고 있는 집을 北村望夫亭이나 다름없다고 했더니 그뒤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어머님의 安否와 함께 北村望夫亭에 관해 묻곤 했다. 北村望夫亭을 37년이나 애타게 지키시던 어머님은 수년전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그리움과 기다림을 恨으로 남기시고 떠나셨다. 그 恨을 풀어 드릴 길이 없어 아버님의 사진과 함께 合葬墓를 만들고 『37년동안 애타는 그리움속에 지내시던 두분이 헤어짐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생전에 못 다한 情을 나누시며 영생하소서』라는 자손들의 소원을 墓碑에 새겼다. 어쩌다 分斷의 경계를 넘어와 고초를 겪던 한 노인이 北으로 송환되어 그가족과 만나게 된다고 하니 北村望夫亭 얘기를 물어오는 분이 있었다. 北村을 벗어날 기회마저 놓친 나는 아직도 그집에 머물며 지내고 있다. 그렇다고 望夫亭이 望父亭이 되었노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墓碑에 새겨 올린 자손들의 소원 그대로 두분은 하늘나라에서 반갑게 만나셨으리라고 믿고 北村望夫亭은 그대로 望夫亭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 왔다. 납북되신 아버님의 연세는 白壽에 가까우시고 납북되시어 온갖 고초를 겪으셨을테니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을 것이고 자식된 도리로서는 기일조차 알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나 素月이 詩로 읊었듯이 잊고 살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北村望夫亭을 지킨 한 노파의 恨마저 몽땅 지워 버리거나 잊혀져서는 안되며 그럴수도 없다. 望夫亭이 어찌 北村에만 있겠는가. 離散의 恨이 사무친 望夫亭은 곳곳에 헤일 수 없을만큼 많을 테고 望夫亭을 떠난다고 해도 離散의 恨이 풀릴 턱도 없다. 마찬가지로 轉向懷柔를 뿌리치고 이념갈등의 사슬에 묶여 수십년의 囹圄生活을 스스로 선택했던 고집쟁이 노인 한사람의 送還으로 수많은 離散家族들의 아픔이 덮어질 수도 없다. 오히려 잊었던 아픔이 되살아 나고 더해지기만 할 뿐이다. 적십자회담을 비롯하여 남북간의 직접대좌가 이루어져 혹시나 하며 가슴설레게 한지도 20수년, 한차레였던가 몇몇 선택된 사람들의 꿈결같은 고향방문이 있기는 했으나 막연한 기대가 무너져 가슴에 못질을 한 것도 몇 십차례였다. 무력통일의 환상에 빠진 채 분단의 경계를 제발로 넘어왔던 한 노인이 늙고 병든 몸으로 들것에 실려 돌아가는데 애무하게 잡혀가고 끌려간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는 아픔이야 望夫亭을 애타게 지킨 혈육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알수 있으랴…. *筆者註 : 이글은 필자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일보지면에 吳道光칼럼이라는 記名칼럼을 연재할 당시 非轉向長期囚 李仁模노인의 북송을 보면서 家族離散의 가장 아픈 被害者였던 어머님의 恨을 지켜보았던 아들의 착잡했던 심경을 담아 1993년3월19일자 한국일보 吳道光칼럼에 실은 글입니다. 글에서도 밝혔듯이 이와 비슷한 내용의 수필인 「北村殘留辯」을 수필동인집에 발표한 바 있으나 쉽게 찾을수 없어 이글을 약간 손질하여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입니다. 글을 쓴 뒤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요즈음 간간히 이루어지는 離散家族相逢을 지켜 보노라면 이글에 담았던 그 착잡한 심경은 그대로이기만 합니다. 이글을 쓴 2년뒤 필자는 결국 北村을 떠났고 北村望夫亭을 허문뒤 새집을 지었으나 새집과 집터만은 그대로 소유하며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세기만에 처음 해본 이사통에 잃어버린 원문을 찾게되면 「北村殘留辯」도 올리고 그속편이 될 「北村脫出記」도 새로 써서 올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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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아람 2008.01.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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