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78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平壤서는 外交活動조차도 鬪爭과 같은 것이었다.』는 初代 北韓駐在大使를 지내고 隱退한 英國外交官 제임스 호어(James Edward Hoare)博士의 述懷였다. 國內에서 가장 오래된 言論人親睦團體인 寬勳클럽은 4월22일아침 프레스센터 國際會議場에서 平壤駐在 初代英國大使를 마지막으로 33년에 걸친 外交官生活을 마치고 은퇴한 英國의 前 外交官인 제임스 호어博士를 招請하여 北韓의 現實에 관한 朝餐懇談會를 가졌는데 이자리에서 호어博士가 述懷한 첫마디가 이러한 말이었다. 1969년 英國外務省에 들어가 外交官生活을 시작한 호어博士는 駐日, 駐韓, 駐中大使館등을 循環하며 줄곧 극동지역에서만 근무한 東北亞專門家로서 南ㆍ北韓 頂上會談直後 英國이 平壤에 大使館을 설치하자 初代大使로 부임하여 大使館設置業務를 指揮하고 영국과 북한의 外交關係基礎를 다진 뒤 2002년12월 外交官 生活을 마치고 隱退할 때까지 平壤에 滯留하였다. 그는 런던大學서 日本史를 專攻하여 博士학위를 받았고 夫人은 英國서 손꼽히는 韓國問題專門家라고 한다. 한다. 그가 平壤에서의 外交活動을 鬪爭에 比喩한 것은 대강 이러했다. 서울과 北京의 英國大使館서 參事官을 歷任한 그는 初代 平壤駐在大使로 任命받고 처음에는 서울에 머물면서 平壤의 大使館設置를 準備하려고 먼저 서울에 왔으나 서울서는 도저히 平壤駐在大使館의 設置準備業務를 推進할 수 없다는 것을 體得하고서는 平壤으로 부임하여 현지에서 준비업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平壤도 大使館設置業務를 推進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래동안 獨逸大使館構內에 머물면서 大使館設置를 준비했는데 赴任初에는 外交官特權같은 것을 전연 누리지 못했고 북한당국과 싸움싸우 듯하며 外交官特權을 하나씩 어렵게 챙겨야만 했다. 赴任初에는 平壤밖으로는 일체 旅行할 수 없었으며 수개월전에 申請한 후 北韓當局의 許可를 받아야만 여행이 가능했고 타고갈 外交官車輛도 北韓當局이 指定하는 運轉技士가 運轉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야 했으나 호아博士가 離任할 때쯤 해서는 事前通告만으로 비교적 自由스럽게 平壤외의 地域을 旅行할수 있었다. 英國外交官들이 平壤이외지역에 위치한 유엔기구지부를 방문하여 유엔機構職員들의 業務를 觀察하고 對話를 나눌 수 있는 水準에 이르렀다. 북한에는 外國公館員이 200명, 유엔機構職員이 200명정도 滯留하고 있다. 그러나 英國外交官이 軍事的으로나 安保上 敏感한 地域(例를 들어 休戰線地域이나 寧邊의 核施設)등을 訪問하였느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아 그에 대해 明示的인 發言은 없었다. 하지만 懇談會의 雰圍氣로는 그러한 水準까지는 다다르지 못했으리라는 共感帶가 形成되었다. 호아 博士가 平壤서의 外交活動이 鬪爭이나 다름없었다고 豫示한 것은 現地大使館과 本國外務省을 잇는 通信手段確保였다. 英國外務省은 在外公館間의 通信手段으로 衛星通信網을 이용하고 있다. 호아博士는 평양으로 赴任하기전 衛星通信網構築問題를 平壤當局에 세차례에 걸쳐 打診하였고 그때마다 아무런 支障이 없다는 답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平壤에 도착하고보니 衛星通信망구축을 허용할 수 없으니 一般回線을 통해 國際電話와 팩스만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5개월에 걸쳐 英國大使館과 北韓外務省은 衛星通信網構築문제를 놓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거듭되는 不許答申에도 불구하고 英國大使館이 끈질기게 요구하자 公館開設6個月이 지나서야 北韓外務省은 考慮해보겠다는 言質을 주었고 다시 6개월뒤에는 當局間에 協議가 끝나 衛星通信網構築을 許容할테니 더 이상 보채지 말라고 긍증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 뒤에도 다시 6개월이 지나서 英國大使館이 이제는 더이상 기다릴수 없다는 忍耐力의 限界를 여러차례 알리자 그제서야 간신히 衛星通信網構築이 許容되었다고 한다. 西方側 公館으로서는 英國大使館이 처음으로 獨自的인 衛星通信網을 構築하자 뒤이어 獨逸 스웨덴등의 西方側 大使館이 衛星通信網構築을 허용받았고 平壤에 派遣된 유엔機構代表部들도 衛星通信網으로 本部와 業務連絡을 취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하나 實現시키는 데에도 北韓에서는 지루한 줄다리기와 忍耐力의 싸움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朝餐懇談會는 호어博士가 30분간의 基調演說을 통해 그가 平壤서 직접 보고 느낀 政治, 經濟, 社會 각부문에 걸친 北韓의 實相을 밝히고 이후 1시간동안 호아博士와 參席者들간의 質疑應答이 있었다. 호어博士는 北韓을 批判勢力이 보이지 않아 政治的으로는 統治가 이루어 지고 體制崩壞可能性이 별로 보이지 않으나 經濟的으로는 완전히 失敗힌 국가이며 사회적으로는 活氣가 없으며 外部와 徹底하게 遮斷된 극히 例外的인 國家라고 指摘했다. 大型工場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重工業은 완전히 崩壞되었고 輕工業도 新技術導入이 거의 되지 않아 까마득히 낙후되었으며 耕作面積이 絶對的으로 不足한데다가 開墾된 農土마저도 地力이 完全히 消盡되어 農事를 지어도 肥料가 없이는 收穫을 거둘 수 없을 만큼 農業은 피폐되어 당분간은 食糧自給能力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北韓經濟는 完全破綻狀態이며 社會間接資本도 30년서 50년, 어쩌면 그이상 落後되었다고 한다. 咸興과 興南등 工業地帶의 大型工場生産施設은 中國에 古鐵로 팔려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軍事的으로도 北韓은 駐韓美軍(더 넓게는 駐日美軍을 포함한 太平洋地域의 美軍 軍事力)과 韓國軍의 軍事力에 크게 威脅을 느끼고 있으며 韓美兩國이 해마다 실시한 팀스피리트訓鍊을 準戰鬪狀況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北韓이 美國側에 不可侵條約의 締結과 體制保障을 끈질기게 要求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느끼는 軍事的인 威脅과 不安感을 그대로 反映히는 것이다. 이러한 安保에 대한 不安과 危機意識은 이번 이라크戰爭의 결과로 더한층 深化되었을 것이라게 그의 見解였다. 그는 中國의 주선으로 美國∼中國∼北韓간 3者會談이 열리게 되어 對話를 통한 問題解決의 문이 열린 것은 歡迎할만 한 일이나 北韓과의 協商이 短期間에 可視的인 成果를 거두리라고 期待할 수 없으며 길고 지루한 協商을 통해 漸進的이고 包括的인 妥結을 摸索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협상에서의 중국의 역할은 회담성사로 일단 끝났으며 협상은 美國과 北韓간의 對話로 전개될 것이며 참여국을 확대한 다자협상은 별 의미가 없다고 전망했다. 그의 모국인 영국의 참여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영국은 참여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유럽국가를 대표하여 EU가 참여할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다. 情報分析家들은 대체로 北韓이 이미 核武器를 開發한 것으로 診斷하고 있으며 北韓이 保有한 核爆彈이 몇개냐는 데에 엇갈린 見解를 보이고 있으나 그는 이제까지 核武器實驗을 한번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북한이 아직 核武器를 保有하지 못하고 있으며 설사 核武器를 保有했다고 하더라도 거의 쓸모가 없다는 見解를 보였다. 地理的인 狀況으로 보아 對南核攻擊은 北韓에게도 直接的인 被害와 危險負擔이 너무 크며 그들의 軍事裝備와 技術水準으로 보아 아직은 核武器運搬手段이 없다는 것이다. 北韓에 대한 食糧과 醫藥品등의 人道的인 支援이 支援意圖와는 달리 軍事的으로 轉用되거나 極少數의 支配階層이 獨占하고 援助를 절실이 필요로 하는 一般庶民에게 까지 公平하게 傳達되지 않는 것 같다는 指摘에 대해 유엔機構가 援助物資의 공정한 配分을 비교적 철저하게 監視하고 있으며 監視가 어려운 江原道일부지역은 援助物資공급지역서 제외;하고 있다고 밝힌 그는 다소의 獨寡占은 있을지 모르나 대체로 적절하게 配分되고 있다고 답했으며 그자신이 지방의 여러집단농장을 방문하여 포장지에 한국과 미국등 지원국가의 표시가 쓰여있는 비료를 공급받고 있는것을 목격했다고 포장지등을 직접 확인하였다고 밀했다. 北韓住民의 상당수가 北韓을 地上樂園이라고 하는 宣傳을 그대로 盲信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호어 博士는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北韓住民이 워낙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되어 바깥 社會에 대한 情報에 전혀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고있는 궁핍한 상황을 외부의 풍요와 비교하여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밝힌 호어博士는 포용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北京과 平壤을 오가는 北韓의 高麗航空塔乘客중 3분의 1은 南韓출신의 韓國人이며 韓國人이 平壤을 많이 訪問할수록 有形,無形으로 北韓을 變化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침7시에 시작된 朝餐懇談會는 9시가 넘어서야 끝났는데 그가 전하는 北韓의 實相은 이제까지 우리가 들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부분적으로는 종전의 개념과 상치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平壤서의 外交活動을 鬪爭에 비유한 것은 상당히 印象的이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한글에서 작업한 내용 복사해서 붙여넣기 file 관리자 2017.09.10 1386
1962 1 홍인옥 2001.11.18 1274
1961 이 성 길 2001.12.08 1286
1960 오도광 2002.04.11 1205
1959 최령자 2003.06.15 592
1958 Flyingrock 2003.09.02 723
1957 3月의 月例山行은 3ㆍ1節에 道峰山 望月寺임니다 오도광 2002.02.14 1279
» "平壤서는 外交活動도 鬪爭이더라" 오도광 2003.04.22 781
1955 12월의 유머 1 오도광 2001.12.14 1443
1954 1월의 유머 오도광 2002.01.31 1480
1953 2월 부부선교회 월례모임 주제토론 정리 최소영 2003.03.05 976
1952 8월산행은 光復節 北漢山元曉峰+藥水庵溪谷 의 濯足! 오도광 2001.08.12 2185
1951 8월의 유머① 2 오도광 2001.08.12 2215
1950 恩惠로운 旋律과 映像과 詩 1 오도광 2003.09.02 821
1949 歸 天 / 千 祥 炳 북촌 2005.06.16 656
1948 가을 하늘색에 마음까지 물들고(47차 산행기, '03.10.3. 금) 김광엽 2003.10.08 958
1947 안동웹진 수신 유명재 2004.02.29 659
1946 어찌하여 그처럼 끔직한 일이.. 1 오도광 2003.02.20 882
1945 저 크고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오도광 2002.08.31 1088
1944 "100주년 맞이한 안동교회여전도회" 장로신문 기사 1 관리자 2013.12.11 485
1943 "기독교사상" 주최 심포지움 발제문 관리자 2004.09.17 70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99 Next
/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