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67년 전 일본의 폭압에서 벗어나 해방 되었지만 지금까지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내가 귀국 후에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식어졌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어려움을 남한이 분담해야 하는데, 현재 남한 내의 문제만으로도 우리는 심각한데 통일이 되면 얼마나 더 힘들어 지겠는가 하는 것이다. 굳이 통일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신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서로 갈라지고 싸우다가 결국 차례로 무너져 다른 나라의 종으로 팔려갈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 막대기의 비유를 통해 장차 이 둘이 하나로 연합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시면 민족은 하나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 속에는 집에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못하는 형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속이 상한 맏아들을 다독여 주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게 된다.
1. 아버지는 뜻이 하나 되게 하신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하신 일로 서운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섬겨 열심히 일했는데 아버지는 자기를 몰라 주신다는 것이다.(29,30절) ‘나는 도데체 뭔가’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잃는 순간, 그는 동생을 받아 주는 좋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존재감을 심어주심으로써 아버지와 한 뜻을 품게 한다.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2. 아버지는 서로 용서하게 하신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벌써 용서했지만, 맏아들은 아직 용서하지 않았다. 받아줄 마음도, 환영할 마음도 없었다.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기면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즉시 먼저 다가가야 한다. 세월은 치유해주지 않고 골만 깊게 만든다. 아버지는 용서할 마음을 주신다.
3. 아버지는 관용의 덕을 주신다. 아버지는 하나를 이루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아버지인들 어찌 둘째 아들에게 괴씸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해하고 관용해 주기로 했다.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잘못된 일도 많지만 기쁜 일을 크게 생각하자. 하나님은 너그러운 마음을 주신다.
아버지가 뾰루퉁한 맏아들에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난다. 맏아들은 기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 동생을 환영했을까?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대문 밖에서 팔장을 낀채 등을 돌리고 서 있을까? 북한 동포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