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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18일(토) 오후 1시
한국교회 100주년 회관에서
월간 <기독교사상>이 주최하는 설교 심포지움을 가졌다.
한국교회 중 대교회에서 설교하는 16인을 선정하여 8명의 신학자들이
그 설교를 비평하였다.
그 기조발제를 내가 맡았고 아래 글은 그 내용이다
.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

 
 

유경재 / 안동교회 원로목사

 

들어가는 말

이번에 기독교사상이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라는 주제 아래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설교자 16인을 선택하여 그 설교의 방향과 그것이 미친 영향을 평가하게 된 동기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기독교사상> 8월호 뒷표지 심포지엄 광고 멘트에 보면,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화'였습니다. 이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교권적 군림을 꾀한다든지,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의 유리, 설교로 포장된 신변잡기적 잡담, 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와 오도된 역사인식을 주입시키는 사례들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설교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21세기 한국교회의 강단의 변화를 촉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교회 강단이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흐름이 개교회 문제나 한국교회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그 강단이 연성화되므로 사회를 올바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운용 교수는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허공을 치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지 못하였으며, 설교가 가지는 예언적, 치유적, 교육적인 기능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설교는 그 영향력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 시대에는 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복음 아닌 것이 교회를 지배하였고, 혹 교회는 많은 재산과 함께 비대하고 부요 했을지 모르지만 설교의 능력은 상실한 시대였다." (김운용, 설교의 영광의 시대는 계속될 것인가?, 인터넷 자료). 지금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바로 교회가 그 사회적 영향력을 잃으므로 이 사회에서 퇴출당할지 모르는 위기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과거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를 개혁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런 사회적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영토의 확장과 성장만을 위해 '올인'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교회는 사회 개혁이 오히려 교회 부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급속하게 민주화의 물결이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때부터 한국교회 성장은 멈추고 그 영향력이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변혁에 소극적인 자기 방어적 자세를 취하여 왔다. 한국교회는 사회의 개혁에 항거하는 보수적 세력에 편입되어 역사의 진보를 훼방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한국교회를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역사의식 없는,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설교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교에는 교회를 변화시키고 그 시대를 깨우치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한국교회 강단이 잘못되므로 그 힘을 잃었고, 넋나간 사람이 길을 잃듯 오늘의 교회는 역사의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길을 잃고 있다. 여기에 한국교회 강단이 새로워져야 할 당위성이 있다.

이 글을 작성할 만한 연구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칫 잘못된 자기 편견을 나열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주저하였지만, 8명의 훌륭한 설교학 교수나 설교평론가들이 16인의 한국교회의 대표적 설교자를 분석한 글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글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설교학자들이 한국교회 많은 설교를 읽고 분석한 글들을 참고하여 한국교회 강단의 대체적인 경향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16인의 설교가 모두 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일괄적으로 그 설교의 경향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 설교 분석을 통하여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들이 바로 한국교회 강단이 안고 있는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기에 이를 종합해 보고자 한다.

신학의 부재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신학이 없다는 점이다. 신학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체계화시킨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의 범위가 성경 안에만 머물지 않고 자연과학과 역사학 그리고 윤리 등이 모든 신학에 포함되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신학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된다. 설교는 항상 성경을 그 텍스트로 사용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해석하여 파악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위하여 주석과정을 거치지만, 단순한 텍스트에 대한 주석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꿰뚫는 그리고 그것의 이해를 돕는 신학적 지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올바른 신학적 지식은 성경을 주석하고 해석하는 일의 길잡이가 된다. 이런 신학의 부재는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든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삼박자 구원'과 '청부론'이다. 두 가지 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도 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현대 크리스찬들에게 이런 메시지는 대단히 매력적이며,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 모순을 느끼지 않고 그 사회 속에서 안심하고 부를 축적해 가게 만든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타난 '아나윔'(가난한 자들)을 '남은 자'로 해서 이룩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해 이룩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있었다면 '삼박자 구원'이나 '청부론'이 얼마나 비신학적이며, 비성서적인가를 곧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부자 청년은 사실상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요, 영생까지 갈망한다는 점에서 그는 그야말로 '깨끗한 부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도 그 점을 인정하셨다. 하지만 영생을 얻고자 할 때 그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자 그는 슬픈 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깨끗한 부냐 더러운 부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에 있으며, 그것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 드리고 있는 자본주의 이념이 결코 우리의 신앙이나 신학이 용납하는 이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부익부 빈익빈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며,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설교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신앙으로 긍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성속(聖俗)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순된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성속의 구분을 넘어서는 길이 아닐까? 오늘의 설교자들이 이런 신학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성장과 현대인의 현실적인 요구와 타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양보하고 현실을 신앙으로 긍정하는 것이 아닐까?

신학 가운데도 특별히 성서신학의 부재가 문제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인데, 기본 텍스트t인 성경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지 못한 채 즉 성서신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그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성경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이해만이 발달하여 교리설교는 활발하게 선포되고 있으나 역동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와 그 시대와 사회의 상황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과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신앙과 삶의 괴리를 심화시켜 온 데 공헌하였다.

폰라드 이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救援史로 이해하는 성서신학의 경향을 한국 교회는 아직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역사 현장이 기독교가 선교된 이래 한번도 평안한 적이 없을 만큼 격동하고 있는데, 교회는 대체로 그 역사를 외면하고 기복적이며, 내세 지향적인가 하면 교권 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져 왔다. 강단의 설교가 바로 이런 경향을 주도하여 왔다고 하겠다. 신앙을 삶의 현장과 연결시켜 주는 설교가 부족하였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60년대 이후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구원사적인 이해 없는 도덕적 윤리적 설교는 교인들의 삶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잘못된 교회론

둘째로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교회 중심의 교회론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교회 성장이 곧 하나님의 나라 실현이라고 이해하는 교회론은 이미 로마캐톨릭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종교개혁 이후에도 별로 변화되지 않았으며, 보수신학을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의 교회론도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교회론을 계승하였다. 이런 교회론이 70년대 경제성장과 맞물려 교회성장론으로 발전하였으며, 그래서 70년대에는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교회 성장론은 개인주의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기복신앙의 만연을 가져왔으며, 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농촌과 공단지역 교회의 소외를 심화시킨 교회의 계층화를 자극하였다. 그뿐 아니라 교회가 점차 보수화 되고 개인 구원에 강조점을 두면서 한국 교회는 점차 '탈사회적'집단으로 변모해 갔으며, 이는 결국 교회가 성장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나머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인수와 화려한 건물에 있어서는 단연 놀라운 증가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성을 상실한 교회로서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올바로 적응할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었다.

한국교회 강단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교회 중심의 교회론 대신 교회를 하나님의 통치(basileia tou  
theou)를 실현시키는 "역사적 종말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새로운 교회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은준관 박사는 그의 저서 <신학적 교회론>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교회를 정의하였다.

"진정한 교회란 역사의 삶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그의 뜻을 신앙으로 분별하는 사람들이 자기 혼자만의 구원과 축복이 아니라 이 역사를 살아가는 이웃 모두와의 공동운명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공동체이다" (은준관, 신학적 교회론, 연세대학교출판부, 1995, pp.434~440.).

따라서 교회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어야 하며, 교회 목회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힘쓰는 목회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 중심 교회론에 몰입하여 있는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김운용 교수는 그의 글에서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통치하심이 중심을 이루던 하나님 나라 목회 사역은 점점 멀어지는 희미한 불빛과 같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학계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들은 활발했지만 강단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아직 깜박거리는 희미한 불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언어들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넘치는 경이감은 상실되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현재적인 사건이나 미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감격이나 흥분을 잃어버리고, 오직 과거의 사건에 고착되어 있다."(김운용, 하나님 나라 선포로서의 설교, 인터넷 홈페이지).

김교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하는 설교의 중심주제라는 전제하에 몇 가지 관련 주제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선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하심, 셋째는 회개, 넷째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종말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이런 주제의 설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기보다는 목회자 자신이 왕처럼 자기 교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보다는 미국처럼 강대한 힘의 통치를 긍정하고 축복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 강단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한국교회 강단에 '회개'는 설교의 흔한 주제이지만, 세상에서 돌이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온전하게 거듭남으로서의 회개라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회개에 머물고 있다. 목회자들의 설교는 교인들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선포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회개는 개인주의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생명 공동체를 향한 자기 희생과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종말을 선포한다함은 이 땅의 삶과 이후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지금 이 세계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통합되어 있기에 이 세계의 모순을 외면한 채 저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아직도 이 땅의 삶과 사후의 삶을 별개의 것으로 가르치면서 이 땅의 현실은 외면하고 저 하늘만을 바라보도록 설교하고 있다. 이런 이원론적인 가르침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삶 따로, 신앙 따로의 삶을 이루게 하였다.

이번에 연구 대상이 된 16인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이런 점들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목회자들이 교회 중심의 교회론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식의 결여

한국교회 강단의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역사의식의 결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가 예언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격변하는 사회에 살면서도 한국교회 강단은 그 시대를 비판하고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정치적인 큰 이슈들에 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므로 교인들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라크 파병이 신앙적으로 옳은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며, 경제 성장이 우선인지 분배가 우선인지 헷갈리며, 북한을 돕는 것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없다. 결국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따라 정치적 문제를 판단하지 않고, 자기가 선호하는 미디어의 정보를 따라 판단을 내린다. 설교자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말씀으로 조명하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생활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실상 한국교회 교인들은 이미 정치적 성향이 분명하여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자기 성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특히 사회의 보수적 흐름에 동승하고 있는 교인들은 목사가 예언적 설교를 통하여 현실을 비판할 때 '정치 설교'를 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가 일수이다. 목회자들은 이런 부담을 덜기 위하여서도 설교의 예언적 기능을 쉽게 포기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시대 주류 세력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을 때 역시 예언자들은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오늘의 목회자들은 현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해가고 있다. 이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갖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현실을 긍정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의 편에 선 십자군처럼 행동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땅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에 편입시키려 한데 반하여 지상의 왕국을 지향한 왕권은 이를 분리시키려 하였다. 오늘 목회자들이 예언자의 전통을 따른다면 이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이끌어 드려야 마땅할텐데, 오히려 이를 분리시켜 이원화하고 있다. 성과 속, 천국과 이 세상, 교회와 죄 많은 세상을 구분하면서 목회자 자신이나 교인들이 주로 전자에만 그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예언적 기능은, 하나님이 그의 통치 아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만드시려는 구원사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데,  설교에 그것이 결여될 때 결국 거짓 예언이 될 수밖에 없다. 16인의 설교 비평에서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난 지적사항이 바로 역사의식의 결여이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시적인 역사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너무 작은 세계인 개인의 신앙에만 집착한 결과 구원사의 흐름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위기를 재빨리 파악하고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지난날의 영광에 도취되어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도 머지않아 그 큰 교회당들이 텅텅 비고 노인들만 몇 명 모여 예배드리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교회로 변모되고, 예언적 기능을 회복한 설교가 선포되는 교회로 거듭날 때 새로운 영광의 날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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