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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다락방' 표지성화 중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어서 따로 스크랩을 해놓았었다. 이제 그 그림들을 해설과 함께 여기에 올린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여관에 방이 없어

그림 : 시아박스 카브다
해설 : 에벨린 버틀러 맥큘로 

이 그림은 인도 봄베이에 있는 J. J. 미술학교에서 훈련받은 현세대의 인도 화가 시아박스 카브다가 그린 것이다. 카브다는 흔히 자기 그림의 주제를 기독교에서 택한다. 그의 최근의 그림도 이 "여관에 방이 없어"와 비슷한 화풍을 취하고 있으나 더 완숙하고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인도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베다와 부라마와 야인과 불교들에서 인간의 종교적 표현을 상징주의적으로 그려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도마가 맨 처음 인도에 선교했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뿌리 박혔고 바다와 육지의 교통로를 따라 퍼져 갔던 것이다. 

인도의 기독교 화가들은 그 재능에 있어서나 작품에 있어서 더 넓게 인정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카브다의 이 그림을 보면, 여관 주인은 요셉과 마리아를 보며 팔로 마구간을 가리키고 있다. 거기밖에 잘 데가 없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아래 쪽 오른편에 구유가 놓여 있다. 

요셉은 주의 깊고 용감한 남편으로 그려졌다. 마리아는 피곤하게 보이나 조심성 있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졌으며 신비한 기대의 분위기 속에 있다. 

 

마리아가 타고 온 짐승도 피곤해 보인다. 그 목에 달린 종은 우리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암시한다. 구약시대에 말목에 단 종에는 "주께 성별해 바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여관 주인이 지정해 준 고장이 어떠하든, 이 위대한 역사의 순간에 사람들이 몰라보았든 간에, 예수의 탄생이 그런 것 때문에 그 능력이나 감화력에 있어서 제한 받을 리는 없었다. 예수의 복음은 영원하며 지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응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정신으로 전 인류와 친교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형제애와 정의와 인자함을 가지고 서로 대할 수 있다. 인간 재능을 발전시키고 봉헌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세계 평화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평화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한국의 성탄

그림 : 김 기창
해설 : 윌터 엘 네이든 
 

다락방은 금년 성탄판 표지에 한 "젊은 교회"의 교우가 그린 작품을 내놓는다. 이 아름다운 성탄광경의 수채화를 그린 교우 김기창씨는 서울 태생으로 한국의 신진 일류 화가이다. 한국동란은 그를 자기 나라 남쪽 끝까지 피난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소유의 잃음이나 어렸을 때의 병으로 기인한 귀먹음이나가 그의 정신을 빼앗지는 못했다. 일찍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그는 예수의 이야기를 자기 백성들이 즉각에 이해할 수 있는 말인 그림으로 전할 결심을 한 것이다. 

표지 성화는 우리에게, 한국의 시골 풍경으로 누구든지 좋아하는 성탄 아침 광경을 말하고 있다. 마굿간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온 목자들에게 새로 나신 구주를 뵙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하여 어쩔 줄 모르고 마리아 옆에 무릎 꿇어 있다. 소와 나귀가 자연스럽게 거기 있고 수탉과 암탉이 색채의 조화를 잘 꾸미고 있다.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면초가집 지붕에 눈이 덮여있다. 생생한 모양과 명랑한 색채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때에 세상에 온 기쁨을 다시 전하는 듯 하다. 

우리는 모양이나 복장을 이 그림에서 따질 것이 아니라 한국의 화가 김기창씨의 정신과 사상을 감상할 것이다. 각국의 유명한 화가들은 복음에 기록된 성탄을 자기 나라에 관련하여 잘들 그려낸다. 역사적 사실보다 복음의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시대와 장소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시대와도 관련이 있고 어느 나라 어느 지방과도 관련이 있어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살아계신다. "한국의 성탄"은 베드로의 말을 상기시킨다.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선한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연합하여 충성스럽게 의와 사랑과 평화의 길을 애써 걸어가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즐겁기 한이 없다.

 

목자들의 경배

그림 : 렘브란트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이 그림은 예수의 탄생에 대한 누가복으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렘브란트가 그린 여러 개의 그림 중의 하나이다. 이 '목자들이 경배'라는 그림은 렘브란트가 1646년에 그린 것으로서 오렌지의 프레데릭 헨리 공에게 바친 것이었다. 

이 예수의 탄생의 이야기는 오랜 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국가나 민족, 시대나 위치와 상관없이 많은 미술가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다. 그런데 미술가들은 흔히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환경과 인물들로 예수의 탄생을 묘사하여 그리는 일이 많은데 이 렘브란트도 그러하였다. 

렘브란트가 그린 '목자들이 경배'의 배경은 자기의 고국인 홀랜드에 있는 작은 여인숙 옆에 있는 마굿간이다. 마굿간에 있는 말과 닭들이 목자들이 온 것을 안 모양지만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있다. 등을 들고, 모자를 쓴 수염이 있는 사람은 아마 여인숙 주인으로서 목자들을 안내 하느라고 들어온 모양이다. 

그가 목자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는 것을 보았을 때에 자기도 아기에게 선물을 드리기 위하여 돈지갑을 꺼내려고 손을 작업복 호주머니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여인숙 주인을 따라나오서 마굿간에서 목자들이 아기에게 경배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림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목자는 천사에게서 아기에대하여 들은 말을 고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른 목자 한 사람은 두 돈을 잡고 기도하며 경배하는 것처럼 보이며, 셋째 목자의 얼굴에는 이사야 선지가 이 아기 예수에 대하여 예언한 바를 회상하고 있는 표정이 나타나 있다. 

렘브란트는 이그림을 전개회전식으로 그리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아기 예수에게 집중되도록 하였다. 여인숙 주인이 들고 있는 등불빛도 아기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그 신비스로운 빛은 아기에게서 다시 반사되어 각 사람의 용모와 마굿간의 구석구석까지 들어내 주고 있다. 

빛되신 그리스도는 언제까지나 세상을 비추어 그의 앞으로 겸손함과 경배하는 마음과 사랑의 정신으로 오는 자에게는 다 구원과 기쁨을 주시리라

 

성전의 시므온
 

그림 : 렘브란트 반 린
해설 : 에벨린 버틀러 매큘로

렘브란트의 그림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 화란 화가는 성경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작품에 대한 강한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종교적 작품을 창작하였다.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 지켜져온 유대인의 법에 첫 아들을 낳으면 가족이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봉헌하면서 예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다. 부자는 양을 드렸고, 가난한 사람은 비들기를 드렸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 거기에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인 시므온이 있었는데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성전에 올라갔을 때 아기 예수가 바로 그 아기임을 알아보았다. 시므온이 아기를 받아서 안고 말하였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슨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이어 경건한 여예언자인 안나가 들어와 그 아기가 예루살렘의 구원자임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래디스 슈밑트는 그의 저서 『렘브란트』에서 화가가 죽기 얼마전에 손녀 티티아를 보았다고 하였다. 그는 손녀를 가서 보고 집에 돌아온지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시므온처럼 그는 출생의 기적 속에서 희망과 약속을 보았다. 

렘브란트는 마리아가 두 손을 마주 잡으므로 경이감 속에서 아기를 응시하는 모습을 포착하였다. 요셉은 이 아기를 양육할 책임을 수용하는 듯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렘브란트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 안나는 여기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녀는 두 손을 펼쳐 들고 "영광! 영광! 내가 주님을 뵈었다"라는 제스추어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시므온의 유난히 큰 손을 놓칠 수 없다. 그의 전체적인 모습이 신비한 빛- 그 빛이 아기에게 집중되기는 했지만- 가운데 들어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신데 대한 영적 기쁨으로 온화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애급으로의 피난 

그림 : 요한 시캇츠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급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마 2:13) 

독일화가 요한 C.M. 시캇츠(1719-1768)는 "애급으로의 피난"이라는 그림을 그릴 때에 그 준비로 세상의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을 상당히 많이 그려 보았다고 한다. 

요셉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다. 그는 오직 어머니와 아기가 언전하고 편안하기만 바랐던 것이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요셉은 밤을 도와서 멀고 어렵고 불안한 여행을 할 차비를 하였다. 그는 앞에서 횃불을 높이 들고 어쨌든 소중한 두 가족으로 하여금 무사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길이 잘 보이고 가장 안전한 방향을 찾아가도록 하려고 하는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시캇츠가 성화를 그리는데 있어서 화란 선생들 특히 렘브란트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시캇츠가 성서의 테마를 다루어서 썩 사람의 마음을 끌게 한 가장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애급으로의 피난'이라는 그림을 그릴 때에는 렘브란트의 스타일을 전적으로 따랐다. 특히 그가 명암 대조법을 사용한 것과 마리아의 검소한 차림차림과 요셉과 아기와 당나귀와 나무숲으로 된 배경 그리고 시냇물 배치를 볼 때 렘브란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화가가 횃불을 가지고 길을 밝히는 동시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얼굴을 비추게 하는데 노력한 것도 완연히 나타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그림 : 알레산드로 막나스코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알레산드로 막나스코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 스테파노 밑에서 미술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베니스에서 이름도 나지 않은 어느 화가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얼마동안 밀란에서 지내다가 1735년에는 고향인 제노아로 돌아와서 13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대 극적인 제노아 사람의 바로크식 미술가로 유명했었다. 

그는 처음에 초상화 작가로 활약했지만 그의 자화상은 하나밖에 없다. 그는 작은 인물들이 그려 있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특히 유명했었다. 그가 그린 종교화들은 좀 거친 듯하나 찬란하고 신비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막나스코의 화풍을 잘 나타내고 있는 표본이라 하겠다. 

이 그림을 보면 화가 막나스코는 예수께서 혼란한 주위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혼란한 세대에 평화가 임하게 하시는 방법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기사를 읽을 수 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유대나라를 통치하는 15년째 되던 해에 세례 요한은 요단강 주변의 모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사죄함을 받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을 것을 권장했다. 때에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를 향하여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신다" 하였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셨을 때에 요한은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제게 오십니까?" 하고 말했다. 이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지금은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모든 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라고 하셨다. 

화가 막나스코는 드라마틱한 필치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시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막나스코는 놀라운 필치로써 하나님께서 만민의 죄를 구속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의 헌신과 준비와 또한 영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어부들 

그림 : 죠르즈 루오(1871-1958)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화가 죠르즈 루오(Georges Roault)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아름다움보다는 풍부한 표정을 나타내기에 더 힘썼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렘브란트의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후기의 작품들은 보석을 깨워서 색조를 조화시키고 흑색의 윤곽을 썼는데 이것은 그가 스테인 글라스에 그림을 그릴 때에 흔히 쓰던 방식입니다. 

이 그림은 칸이 막힌 것처럼 되어 있어서 육지와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해변에는 세 떼의 무리가 서 있거나 일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흰옷을 입고 가운데 서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시몬과 안드레와 함께 서 계신데 이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고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이들 왼쪽으로도 몇 사람이 모여 있는데 이들은 아마 시몬과 안드레가 부름 받는 사실을 이상히 여겨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어부들은 이런 일쯤은 문제도 삼지 않고 고기잡이를 떠나려는 사람들입니다. 

세 배의 돛들이 각기 뜬구름을 향하여 펼쳐 있고, 이 전경에 햇빛이 비취고 있는데 이 빛은 예수님과 시몬과 안드레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에게 나타내게 하시려고 하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여인 

그림 : 렘브란트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렘브란트(1606-669)가 자기 고향인 화란에 살 때에는 당시의 화가들이 왕이나 궁정 또는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때였다. 따라서 작가들은 현실적인 풍경이나 초상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림의 주요 구성요소로서 물체에 비치는 빛을 강조하였다. 렘브란트의 위대한 예술은 명암대조에 대한 기교와 그의 상상력과 창조력과 따뜻하고 풍부한 감정으로된 것이었다. 그는 모든 화란작가들 중에서 뛰어났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화풍으로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여인"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3세기 후인 오늘날에도 인간적인 매력이 있고 마치 당대의 것인것처럼 우리에게 감명을 준다. 우리가 이 그림을 볼적에 우리 자신 그 장면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생수의 필요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그림은 수가성에서 달려온 제자들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순간의 모습을 완연히 나타낸다. 침침한 음영 가운데 우리는 제자들의 어떤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얼굴 표정에는, 자기가 전에 한 일을 다 말해준 이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역역히 나타나고 있다.

 

잃어버린 은전 

그림 : 도메니코 페티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도메니코 페티(1589-1624)는 로마에서 출생하여 베니스에서 죽었다. 로도비코 치골리와 또 다른 여러 학교에서 수학한 후 그는 만투아 공작을 위한 궁정화가로 초대받아 그림을 그렸다. 그는 특히 1613년에서 1621년 사이에 예수의 비유를 그림으로 나타낸 여러 개의 풍속화를 그려 명성을 떨쳤다.

잃어버린 돈의 비유(눅 15:8-10)에 나타난 돈은 우리 나라 말 번역 그대로 은화이며, 이 은화 한 개는 예수님 당시 하루의 품삯에 해당한 가치이다. '예술 공보'란 잡지에 미국 시라큐스 대학의 아스큐 교수는 이 페티의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등불은 교회를 대표한 여인의 손에 들려 잃어버린 죄인들 또는 자기들의 태만 때문에 신앙에서 탈선한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이 '잃어버린 은전'에 나타난 생명이 약동하는 사실주의와 그 의상 그리고 그 단순성은 이 작가와 동시대 사람인 유명한 화가 카라박이오란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은 필치라 하겠다. 특히 이 그림에 나타난 여인상의 그림자를 두드러지게 표현한 강한 명암의 대조 같은 것은 그러한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그 그림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 있지 않은 모든 것은 이렇게 어둠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무질서한 방의 모습은 그 여자가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던가를 잘 나타낸다.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유실 감정과 그것을 찾고자 하는 강렬한 의도는 그 잃어버린 은전을 한 개인, 한 민족, 그리고 이 세계라고 할 때 더욱 더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림의 작가 도메니코 페티가 예수의 비유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에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단순한 소재를 쓰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고요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그 잃어버린 은전은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 기쁨의 시간이 올 수 있고 이 무질서한 방의 혼돈 상태도 다시 회복될 날은 오직 그 은전이 발견된 다음이다. 비록 찾기 위한 괴로움이 심각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안겨질 때까지 그들을 찾아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그림 : 빈센트 반 고흐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어느 시대나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 못한 동시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화란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렘브란트 이래로 가장 위대하고, 혁명적인 화란의 화가"라고 불리어졌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6년 동안에 그린 1,500개나 되는 작품 가운데서 단 한 개의 작품을 팔았을 뿐이다. 만약에 그가 좀더 많은 작품을 팔 수 있었다면 그는 좀 더 확고한 사상과 더 좋은 인식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아마도 그가 질병과 절망으로 인하여 37세의 젊은 나이에 자멸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 고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 매우 동정적이었다. 이는 자기를 고통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 두어 생각하는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살며 벨기에의 Borinage의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같이 나누어 보기도 하였다.

그가 체험한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88년부터였다. 그의 형 데오는 인상적인 화법으로 자기 메시지를 전하도록 그를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사마리아 사람이 과연 선한 이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말에 태워서 주막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사람이 상자 속에 있던 귀한 물건들은 다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자기 생명만은 구할 수 있었다. 

이 그림에 여리고로 가는 구부러진 길에 저마다 따로 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인다. 고흐는 그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얼마나 경건을 가장하고 있는지 이 그림에서 잘 보여주었다. 

반 고흐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또 사마리아 사람과 비교해 보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의 선한 이웃들도 개인적으로 혹은 여러 기관을 통하여, 사악한 사람들에게 매맞고 도적 맞은 사람들과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사람들에 멸시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행하자.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

그림 : 프릿츠 우데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매큘로
 

프릿츠 우데(1848-1911)는 삭소니 볼케부르크에서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군복무를 마친 후에 유명한 항가리 화가 미할리 문카시와 함께 프랑스와 홀란드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뮤니히에 있는 예술연구원의 교수로서 우데는 미술의 신사실주의파를 대표하였다. 현대 독일식의 형태를 띤 그의 성서에 관한 그림들은 색혼합과 산광(散光)을 이용한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온화함과 순수함이 가장 만족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그림은 우데 교수의 많은 종교적 작품 가운데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최초의 것이다. 아마도 이 그림의 착상은 1885년 그의 아내가 죽은 후 그에게 떠맡겨진 책임으로 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자주 방문하는 동안에 생겼을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요단강 저편 유대 지경에 가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무리가 그를 따랐는데, 어떤 이들은 병 고치기를 바랐고, 어떤 사람은 많은 질문을 하였다. 어떤 부모들은 그의 어린아이의 머리에 예수께서 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고 애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제자들은 이것을 막고 그들을 책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마 19:14)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새로운 태도를 가르치셨다. 

우데는 이 사실을 학교에다 적용시켜 보았다. 선생님은 뒷 창문 곁에 서서 아이들이 특별한 방문객인 예수님 주위로 몰려드는 것을 막지 않고 있다. 어떤 아이는 벌써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다. 어떤 아이들은 수줍어서 그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서 있다. 기특하게도 참을성 있게 다른 아이들은 예수님을 만날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 우리의 주의는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실 때 아주 정직하고 총명하고 의지하는 듯한 얼굴을 쳐들고 있는 어린 소녀의 영감적인 모습에서 좀처럼 옮겨지지를 않는다. 프릿츠 우데는 그리스도께서는 그 시대와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 속에 처해 있는 인간들에게 능력 있게 전하시려는 메시지를 가지고 계심을 그림으로 나타내려고 시도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이 화가는 천국이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징표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이미 우리 중심에 실현되었음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천국을 요청하기를 바라고 믿음으로 인간 사회 속에 이루어진 천국에서 살도록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나면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시는 그리스도

그림 : 로도비쵸 카라치
해설 : 윌터 엘 나단 
 

플로리다 주 싸라쏘타에 있는 '존과 메이블 링글링 미술관' 안에는 여러 이태리 그림들 가운데 "나면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시는 그리스도"라는 한 폭의 인상 깊은 그림이 있다. 그것은 이태리 볼로냐 학파의 그림으로서 이전에는 그 학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로도비쵸 카라치(1555-1619)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그림의 뚜렷한 수직선들은 향상의 감각을 표시해 주며 거기 있는 큰 인물들은 아무 불필요한 명세 없이 명암의 강한 대조 안에 구성되어 있으므로 해서 이 그림이 참 유명하다. 그 인물들은 우리와 무척 가깝다. 우리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믿음과 갈망의 태도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경의 눈과 이마에 그 손을 부드럽게 대시는 동시에 예수의 밝은 얼굴은 가장 깊은 애정으로 불타고 있다. 그 소경의 전 존재는 그대로 하나의 말없는 기도와 같으니 그로 인하여 그를 사로 잡고 있던 어두움이 그에게서 제거될 것이다. 치료의 영능이 그의 운명적인 밤의 어두움을 내쫓기 위하여 이미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오래지 않아 그 소경 거지는 예수의 명령대로 아마도 얼마간 떨어진 곳에 지목된 실로암 못을 향하여 갈 것이다. 거기서 그는 눈을 씻을 것이요 그리고는 신기하게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노라면 인류의 고통에 대한 그의 사심 없는 관심과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의 헌신적 애착을 찾아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고, 오직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적을 베푸셨다. 우리 구주의 인격과 교훈에 나타난 그의 사랑은 어두움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빛을 실어다 준다. 

예수는 사람의 육체적 질병과 결함을 그 소경의 이웃사람들처럼 무관심 혹은 경멸하는 태도로 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욕심, 편견, 미움으로 어두워진 마음들을 열어주어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이제는 본다"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인도해주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백부장의 간청

 

세금으로 바칠 돈 

그림 : 티티안(1490-1576)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티티안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진 유명한 베니스 화가 티지아노 베셀리오는 알프스산 고원지의 도성인 파이브디 카도르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소년 시절에, 꽃에서 즙을 내서 채색 칠을 한 초기 작품은 매우 잘 되어서 이미 어려서부터 베니스에 있는 삼촌집에서 지내면서 '벨리니'미술 연구소에서 공부하였다. 1516년에 선생 벨리니가 죽자 티티안은 그의 뒤를 이어서 베니스 공화국의 화가가 되었다. 

그의 예술이뛰어나게 되어, 당시 인간의 경험과 본서오가 교양에 흥미가 집중된 사회적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그의 예술에 드러냈기 때문에 티티안은 현대 미술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불려졌다. 어떤 비평가는 그 종교 테마를 다루는 것이 본질적으로 심령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지마는 그의 작품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작품을 수정해서 완전한 형태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가끔 광선을 조절하거나 약간씩 강한 빛을 칠하는데 화필을 쓰지 않고 자기 손을 썼다. 

이번의 표지는 헤롯당에 속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가이사를 대적하는 자로 꾸미려는 모략을 하고 혹은 백성 사이에서 지도적인 세력을 가지신 것을 방해하려고 꾀하는 한 순간을 그리려고 한 것이다. 맨 왼편에 있는 사람으로 예수님에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 부가하니까?" 물어 보도록 한 자는 예수께서 그 질문에 대답하시기 전에 '셋돈'을 내놓은 헤롯당 사람일 것이다. 

옛날에는 왕의 초상이 있는 화폐가 통용되는 기간에만 그 권위가 존속하게 마련이었다. 이 셋돈은 으레 왕에게 바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돈은 왕의 개인적 소유로 알았다. 

예수께서는 화폐에 새겨진 초상에 그들의 주의를 끌게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하신 다음 곧 뒤이어서 "하나니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다. 

티티안은 이 그리에서 주님의 모습을 생활의 순결과 권위로써 표현함으로 주님을 더 알게 하였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킴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땅히 할 의무를 알려 주신다는 것을 완연히 표현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 같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 나라의 특권에 대하여 보답하는 데는 우리 개인의 직무로 생활 목표를 삼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는 데 있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

그림 : 포드 마독스 브라운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포드 마독스 브라운은 프랑스의 카라이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는 영국인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벨지움과 파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로마 화가들의 그룹인 '나사렛'의 중요 회원인 프리드리히 오버벡은  브라운에게 Mannerist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도록 지도하였다. 이런 양식은 포즈를 잡은 사람의 모습의 탁월성에 집중되었다. 

화가로 인정을 받은 브라운은 런던에 돌아와 정밀화 부분에서 탁월한 활동을 하였다. 교사인 그는 제자들에게 "캔버스를 무대로 생각하고 드라마를 연출하라"고 가르쳤다. 브라운 역시 스테인드 그라스 창을 디자인하였고, 공공건물의 실내장식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그는 1893년에 죽었는데, 그때까지는 그의 아내와 딸의 도움을 받았다.

보이번호 표지 그림에서 화가는 의도적이면서도 겸손하고 종이면서도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자들의 얼굴은 의심과 당황함으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들의 손은 예수님의 행동 때문에 긴장하고 낭패한듯한 기분을 드러내듯 꼭 쥐어져 있다. 

이 그림이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베드로이다. 격렬하고 충동적인 제자인 베드로가 그의 샌들은 옆으로 벗어던졌다. 그의 손은 마주 꽉 잡았고 그의 머리는 거부하려는 자세로 숙여져 있다. 그가 예수님께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라고 하셨다. 상징적 세족의 의미가 무엇임을 알게 된 베드로는 "주님,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포드 마독스 브라운의 이 걸작은 보는이로 하여금 "겸손의 앞치마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그리스도의 상징적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

그림 : 포드 마독스 브라운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포드 마독스 브라운은 프랑스의 카라이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는 영국인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벨지움과 파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로마 화가들의 그룹인 '나사렛'의 중요 회원인 프리드리히 오버벡은  브라운에게 Mannerist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도록 지도하였다. 이런 양식은 포즈를 잡은 사람의 모습의 탁월성에 집중되었다. 

화가로 인정을 받은 브라운은 런던에 돌아와 정밀화 부분에서 탁월한 활동을 하였다. 교사인 그는 제자들에게 "캔버스를 무대로 생각하고 드라마를 연출하라"고 가르쳤다. 브라운 역시 스테인드 그라스 창을 디자인하였고, 공공건물의 실내장식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그는 1893년에 죽었는데, 그때까지는 그의 아내와 딸의 도움을 받았다.

보이번호 표지 그림에서 화가는 의도적이면서도 겸손하고 종이면서도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자들의 얼굴은 의심과 당황함으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들의 손은 예수님의 행동 때문에 긴장하고 낭패한듯한 기분을 드러내듯 꼭 쥐어져 있다. 

이 그림이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베드로이다. 격렬하고 충동적인 제자인 베드로가 그의 샌들은 옆으로 벗어던졌다. 그의 손은 마주 꽉 잡았고 그의 머리는 거부하려는 자세로 숙여져 있다. 그가 예수님께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라고 하셨다. 상징적 세족의 의미가 무엇임을 알게 된 베드로는 "주님,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포드 마독스 브라운의 이 걸작은 보는이로 하여금 "겸손의 앞치마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그리스도의 상징적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최후 만찬 

그림 : 엘 그레코(1541-1614)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이 작가는 그레데 섬 출신이며 본명은 도메니코스 데오도코플로스이다. 젊은 시절 그는 이탈리아 베니스와 로마에 가서 그림을 배웠다. 1577년 그는 스페인에서 유명하게 되어 엘 그레코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톨레도에 거주하면서 그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가 유한 톨레도는 해마다 수 천의 여행자들이 찾아들어 이 예술가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 

엘 그레코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이 독특하다고 한다. 이 작가는 자기 그림에서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고통과 불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그리려고 애를 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엘 그레코는 사색하는 작가라는 칭호를 받아 온 사람으로 자기의 그림에서 신비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을 자유스럽게 표하는 데 붓을 움직이고 있는 상상적인 화가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것을 넘어선 상징으로 특성을 가지도록 되어 있다.

이 '최후 만찬'이란 그림은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의 전통적인 의도 그대로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와 함께 먹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리라" 하신 말씀의 반응을 제자들이 어떻게 보여 주는가하는 초점을 두는 방향에서 그리고 있다. 여기 제자들의 반응은 놀라운 표정이다. 어떤 제자들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부정적인 태도인가 하면, 또 예수님 정면에 앉은 다른 이들은 "우리가 선생님 말씀을 정확하게 듣기나 했는가" 서로 묻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주여, 내니이까?" 하고 묻고 있다.

예수님 오른편에 앉은 가룟 유다는 은 30이 든 돈주머니를 걸머잡고 있다. 그는 선생님 면전에서 어둠 속으로 떠나가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하려는 순간의 표정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종종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피차에 신의를 두텁게 하여 서로가 상대방을 배신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게 된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시키게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친구와 더불어 식사를 같이 함으로 우리의 지성을 피차에 자극시키며 도전과 강화와 보전의 노력으로 우리의 영적 생활을 배양하기도 한다. 

주님 식탁에 자리를 가지고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심한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겟세마네의 그리스도 

그림 : 엘 그레고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엘 그레고(1541-1614)는 크레테 섬이 베니스에 속해 있을 당시 그 섬에서 태어났다. 초기의 미술 교육을 받은 다음에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티티안과 틴토레토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드디어 그는 스페인으로 여행하여 1577년부터 최후까지 톨레도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레고의 작품은 스페인의 엘 에스코리알, 마드리드, 톨레도 등지에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작품들이 전 세계에서 수집되고 있다. 이 그림의 원본은 스페인의 톨레도 오히오 미술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엘 그레고는 그의 아이디어를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의 작품 '겟세마네의 그리스도'에서 그 현란한 빛과 색채를 쓰는 기술과 구상면의 다양성과 주제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말미암아 시각적인 인상과 동시에 심리적인 효과도 성공적으로 구현하였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예수님의 격렬한 영적 고민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다가오는 반역과 부인, 고난과 정죄, 핍박과 죽음을 당하시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친히 도우심과 강한 힘을 구하고 있다. 예수는 비록 생명을 잃을지라도 그 "잔을 마시기로" 결심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고 죽으셨다. 이러한 그의 사랑과 희생으로 세계를 구원할 수 있었다. 엘 그레고는 기도하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달빛을 이용하지 않았다. 잔을 든 천사의 광채와 인간에게 사랑을 알리려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고통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구세주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광선을 사용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

 

십자가에서 내려오심 

그림 : 렘브란트 반 린
해설 : 에벌린 버틀러 맥큘로 
 

이 달호 다락방 표지 그림은 1633년에 화가 렘브란트(1606-1669)가 오렌지의 프레데릭 헨리를 위하여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주제는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이다. 화가 렘브란트는 흰 린네르를 사용함으로써 저물어 가는 햇빛이 더욱 잘 반사되고 퍼지게 하였다. 그림에서 젊은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에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느라고 분주한데 왼쪽에는 늙은이들이 아주 슬퍼하며 실신해 하는 모양으로 서 있다. 

화가는 그림의 뜻을 더욱 깊게 하느라고 성경에 나타난 기사와 부합되는 몇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십자가 바로 밑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서 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바라보다가 기절해 버린 마리아를 다른 여자들이 간호하고 있는데 그들 중의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예수께서 입고 계신 옷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는 이는 아마 산헤드린의 주요한 의원의 하나인 아리마대 요셉일 것이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의 결의와 행사에 동의하지 아니한 사람이다. 

풍채가 늠름하게 생긴 사람은 예수를 맨 처음으로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이리라 생각한다. 그는 이제는 예수의 시체와 함께 묻을 많은 향료를 가지고 아무도 거리껴 하지 않고 당당하게 온 것이다. 그는 예수의 교훈을 들었을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보여 주신 예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보고 감격하여 주께로 나온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 나옴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림의 배경에는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문으로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들은 어리둥절하고 실망한 나머지 전에 하던 일이나 하겠노라고 돌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경륜이 실현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화가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예수의 친지들이 예수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잘 묘사해 놓았다. 이 친지들은 그들의 슬픔, 동정 또한 봉사의 정신을 자기들의 친지인 예수에 대하여 유감없이 잘 나타내었다.

 

 

"놀리 미 탄게레"

그림 : 조지 매뉴엘 데오토코풀리
해설 : 에벨린 버틀러 매큘로
 

"놀리 미 탄게레"는 희랍어로, "나를 만지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그림은 화가 엘 그레코 부자(父子)의 합작이라고 하지만 엘 그레코의 아들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아버지 엘 그레코의 영향은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이 길어진 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 때문에 이 그림을 엘 그레코의 그림으로 잘못 알게 된다. 그림은 자기 아버지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사실 엘 그레코가 인물을 스케치해 가지고 그 후에 아들이 그렸는지도 모른다. 조용한 인물을 그리는데  특히 얼굴을 길게 그리는 화풍에 어울리지는 못하나 배경의 나무와 구름을 자연스럽게 그려 넣음으로 작품을 완성한 것 같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다음 일요일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마리아가 무덤에 왔다. 마리아는 막았던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고했다. 그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곧 무덤에 와서 마리아의 말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울면서 무덤에 머물러 있었던 마리아는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더니 결국 확실히 부활하신 주님이었다. 

화가는 이 이야기의 다음 부분을 그린 것이다. 막다라 마리아가 손에 못자국을 보고야 분명히 그리스도신 줄을 깨닫자, 주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이다. 그 때에 주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엘 그레코가 인물을 길게 그린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 일파에서는 그의 화풍은 난시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일파에서는 심리적, 심령적인 면으로 표현하려고 한 데서 된 일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한 파에서는 엘 그레코는 균형은 침체를 의미하는 것이요 침체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놀리 미 탄게레"(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그림에 표현된 것은 생명이요 영원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엠마오의 저녁

그림 : 렘브란트
해설 : 윌터 엘 네이든

 

화란의 렘브란트(1606-1669)처럼 철저하게 자기의 그림을 성경 중심으로 그린 화가는 없다. 그의 수많은 그림과 조각은 신구약의 장면과 인물을 취급한 것이다. 성경은 그의 주요한 영감이요,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도전이었다. 당시의 신학적 논쟁에 별로 관심이 없는 렘브란트는 구세주 자신 위에 자기의 신앙을 두었다. 그는 예수를, 낮은 자들 사이로 겸손히 다니시며,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시고,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사랑으로써 죄인에게서 죄의 짐을 벗겨 주시는 인자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가장 감명 깊은 걸작중의 하나인 엠마오의 저녁에서 보여 주는 예수이다. 이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존경하는 선생님의 비참한 죽음과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가 주님이신 줄 몰랐으나 그는 그들을 만나 그의 죽음과 부활의 뜻을 설명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셨다. 

저녁 때 엠마오에 도착하자 그들은 예수에게 머물러 식사를 같이 하시자고 청하였다. 그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실 때 그들은 눈이 열려 그가 누구이신 줄 알게 되었다. 

그의 축사하시는 음성이 이 길쭉하고 침침한 방에 아직도 울리고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 모양으로 제자들은 좋은 주님을 바라다본다. 그의 온유하신 몸 전체가, 흑암의 심연을 꿰뚫는 것 같은 내부적 빛으로 빛난다. 이처럼 그들과 마주앉아 성만찬의 떡을 떼시며 무한한 위로를 주시는 그를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오늘도, 어디서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그는 교제를 통해서 가까이 계시고 위로하신다. 부활절의 교훈의 중심은, 즉 살아 계시사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의 은혜를 통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그의 말씀의 진리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서 전도하라

그림 : 유진 버난드
해설 : 알벌 이 베일리

화가 : 유진 버난드(1850-1921) 스위스 사람, 특히 신약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잘 나타낸 유명한 화가로 1908년에 파리에서 신약성화 84점을 출품 전람시켰다. 

그림 : 1908년 후에 그린 그림이다. "가서 전도하라"는 간단한 그림 제목은 우리의 위대한 선생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 곧 어느 세기를 말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젊은이에게, 다시 말하면 우리 개인개인에게 충성과 봉사를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이 그림 제목 "가서 전도하라"는 '가서 가르치라' '가서 장사하라' '가서 그림 그리라' '가서 밭갈라' '가서 노래하라'―이 모든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얼굴과 눈을 보라! 높은 이상에 불타고 있지 않은가? 눈은 약간 지면 이상의 어떤 곳을 내다보고 있으면서 어떤 목적물에 쏠려있지도 않다. 시선이 높고 넓은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손은 어느 것을 특별히 짖거하고 있지 않다. 우주적이다. 

다음으로, 젊은이의 얼굴을 보라! 이맛살둁르 찌푸렸고 눈은 초점을 맞추어 가지고 먼 목적물에 집중하고 있다. 제자는 열심히 한 특정된 목표 곧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장소에 전심전력할 자기 사업을 찾느라고 애쓰고 있다. 

두 얼굴에 나타난 차이는 계획적이다―그리스도는 사랑으로써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환상을 가지셨는데 이 이상을 실천시키고 구체화 할 사람은 제자이다.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수백만 신도가 천국의 환상을 보고 특수한 사업을 골라 행하였다. 각자는 그리스도의 영감과 능력 아래서 어떤 정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자신의 길에 비치는 한줄기 빛을 따라 행하였다. 

젊은이의 어깨를 끼어주신 그리스도의 왼팔을 주목하여 보라! 그리스도의 머리는 약간 젊은이 편으로 기울어있고 붉은 두루마기는 두 사람을 감쌌다. 버난드는 이런 글을 썼다.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뉘게 하랴" "나는 나를 힘있게 해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기억에 색일 만한 값있는 그림이다.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고 바로 생각하게 해주고 용기를 주는 그림이다.

 

세상의 빛 

그림 : 윌리암 홀만 헌트
해설 : 윌터 엘 네이든
 

윌리암 홀만 헌트(1827-1910)는 런던 왕실 미술학교의 학생으로서 당시의 미술이 기백이 없고 피상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젊은이의 열정과 용기를 가지고 그가 사모하는 옛날 이태리 선배 화가들의 정시과 태도로 미술을 새롭게 할 생각을 하였다. 같은 주의를 가진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 밀레이와 가브리엘 로세티가 있다. 그는 1848년에 미술가들과 시인들의 '사실파'를 이룩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노력이 비평만 받았고 천대까지 받았다. 그러나 헌트의 그림 "세상의 빛"은 급속도로 유명해졌다. 1854년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원본은 지금 옥스퍼드 케이블 대학에 있다. 사실파 예술가들은 바로 해산되었으나 헌트는 끝까지 자기의 높은 이상을 지키었다. 그는 천천히 매사에 조심스럽게 붓을 놀리었다. 여러 번 성지를 순례했는데, 이는 자기가 마음먹은 종교적 그림이 될 수 있는대로 가장 확실한 배경을 가지게 하려 함이었다. 

"세상의 빛" 성화는 요한계시록 3:20에 있는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린다"는 성경구절을 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하얀, 금빛나는 옷은 그를 대제사장이며 왕으로 나타내고 있다. 가시로 엮은 면류관은 그의 희생적 십자가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비치는 등불은 양심의 빛을 상징한다. 예수는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가 오래오래 잠가두어 잡초가 우거진 우리의 마음문을 열라고 하신다. 화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가 들어오시기를 끈기있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들어오시라고 하지 않는 우리는 얼마나 염치 없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들어오시게 하면 우리의 생활은 그가 가져다 주시는 기쁨으로 응답될 것이다. 공포는 용기로, 약함은 강함으로, 이기심은 사랑으로 바뀔 것이다.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는 집에서, 사회에서, 나라에서 그를 언데나 증거할 것이다. 오래 전에 윌리암 로우가 그의 글에서 "복음의 모든 기쁜 소식, 우리 구주의 모든 은혜… 모든 것이 이 한점에 집중하였으니 곧 그는우리의 빛이시오 생명이시오 부활이시오 주요 구원이심이요,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니 의로 다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위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게 됨이라"라고 한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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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기타 다락방 표지 성화로 본 구약 file 2007.12.03 3129
» 기타 다락방 표지 성화로 본 예수의 생애 01 file 2007.12.03 2857
76 기타 정윤철의 성경삽화 03 file 2007.12.03 2121
75 기타 정윤철의 성경삽화 02 file 2007.10.10 2961
74 기타 정윤철의 성경삽화 01 file 2007.10.09 2797
73 기타 상만 유연준 서화 50년 유연준 2014.05.30 772
72 기타 연하장 유경재 2012.02.01 569
71 기타 Lee Young Soon - illustration file 이영순 2011.03.04 827
70 기타 성지의 향기 file 윤경남 2007.10.12 1980
69 기타 제3의 성지로 가는길 file 윤경남 2007.10.12 1871
68 기타 무리요 - 성가족 2011.06.23 750
67 기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2011.06.07 738
66 기타 최후의 만찬 2011.06.07 883
65 기타 삼손과 데릴라 2011.06.07 696
64 기타 세례를 받으심 2007.10.11 479
63 기타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 2007.10.11 442
62 기타 최후의 만찬 2007.10.11 758
61 기타 가나의 결혼 잔치 2007.10.11 531
60 기타 바벨탑 2007.10.11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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