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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1 01:55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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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최후의 만찬(1498)

Tempera on plaster, 460 x 880 cm (15 x 29 ft.)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Refectory), Milan

화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건축가, 조각가로서 너무나 많은 재능을 지녔던 그는 피렌체의 공증인을 아버지로, 시골 처녀를 어머니로 삼아 사생아로 태어난 기박한 운명의 소유자였으나,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작가로서의 소양을 키우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성과 비범한 노력은 유럽 제일의 예술가와 지식인으로 자리매김 했으며, 회화에 있어서도 걸작을 남겼는데, 그중에 대표가 바로 이 작품과 너무도 알려진 모나리자(Mona Lisa: 1503- 1506)가 있다.

이 그림이 이상한 인연으로 더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년 전 영국의 댄 브라운(Dan Brown)이라는 작자가 이 작품에 나타난 사도 요한의 모습에다 중세기부터 떠돌던 소문 수준에 가까운 이상하고 얄팍한 역사 지식을 조합해서 만든 소설 “다빈치 코드 : The Davinci Code) 라는 책이 온 세계를 뒤흔드는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서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게 되었다.

더욱이 댄 브라운은 이 작품과 전혀 무관한 지난 세대에 시작된 오푸스데이(Opus Dei)까지 등장시켜 마치 가톨릭 교회가 자기들의 부끄러운 과거 비밀을 숨기는 음모를 지닌 집단인 것처럼 만들면서 자기의 작품이 이런 교회의 어두운 부분을 시원하게 폭로하고 밝히는 정의의 투사 같은 태도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연루된 뜬 소문에 가까운 조잡한 까십(gassip)수준의 지식을 비교적(秘敎 : Esoteric )차원에서 해석해서 참으로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이 작품에서 예수님의 오른 쪽에 앉아 있는 사도 요한을 막달레나로 단정하고 두 사람간의 관계를 남녀관계로 까지 확대시키면서,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가 있었고, 그 후손이 영국과 프랑스에 살고 있던 작중인물이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이 황당한 가설에 온 세계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정신이 빠져 작가의 황당한 지적 사기에 끌려 다닌 적이 있으며 아직도 신자들 중에서 이 작가의 견해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사기 차원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작가는 자기 나름대로 복음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요한복음 13장 21- 24절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내용을 그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게 하였다.

다른 여러 작가들도 이 주제에 접근했으나(성화해설 : 50) 세족례로 부터 성체성사 제정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부분을 다룬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최후만찬의 한 일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나 거기에는 이미 기량이 대단한 작가들이 많아 기량을 인정받기 어려운데다 설상가상으로 1481년 보티첼리, 페루지노, 피에로 델 코지모, 기를란다요 같은 피렌체 화가들이 교황 식스토 4세로부터 바티칸으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작가는 빠져 있었다.

그의 천재성을 수용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피렌체를 떠나 새로 시작된 밀라노 공국을 새 활동지로 결정하고 떠났다. 밀라노 공국은 당시 이태리에서도 부유하고 근대적 산업이 발달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군주인 루드비코 일 모로(Ludvico il Moro)는 밀라노를 지식과 예술의 차원에 있어 이태리의 “아테네”로 만들어서 당시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던 피렌체나 만토바, 페라라와 동등한 처지로 격상시킬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작가는 이런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적격자였다.

이런 시기에 작가의 만남은 루드비코에게도 큰 기쁨이 되어 대단한 환영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작은 자기 집안인 스포르쟈(Sforza) 가문의 무덤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은 도미니코 수도원 식당에 걸 목적으로 이 주제를 선정 후 작가에게 그림을 의뢰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당시 이 대작을 그리기에 적격인 처지에 있었다. 그는 “정신적인 것으로서 회화에 대한 개념” “광학과 음향효과, 해부학과 역학 분야”에 관한 다양한 경험들을 이미 습득했기에 이것이 바로 작품에 이용되면서 이 작품은 걸작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정의하면서, 작품에 바로 이 원칙을 적용해서 성서의 내용들을 등장인물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을 침묵 속에서 전하고자 했는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성공적이다.


작가는 예수님 생애의 이 중요한 사건을 극적으로 전할 리포트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심사숙고 후 최후만찬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슬프고 충격적인 부분을 집중적으로 묘사했기에 다음 성서구절의 강조를 통해 최후만찬의 신앙적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 24)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이 반응이 바로 이 작품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의 평화롭고 화기애애함이 아닌 천정으로부터 바위가 식탁에 굴러 떨어졌다는 가상 앞에서 제자들이 보인 반응과 같다. 한마디로 스승의 말씀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 뜻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서로 웅성대는 모습이다.


작가는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좌우 대칭으로 제자들을 배치하면서 전체적인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주님께서는 중앙에 앉아 계시는데,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양쪽 제자들과 거리를 둔 모습이시다.

스승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너무 충격을 받아 서로를 바라보며 이 진상을 확인하고자 하는 과정이기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 스승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 자기들만 뭉쳐 있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을 더 없이 고독하게 만들고 있다.

이 고독과 격리의 순간에 주님께선 양손으로 빵과 포도주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성체성사를 이루시는 자세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배신에 이어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 1)라는 말씀으로 자신이 부서지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최고로 승화된 주님을 사랑을 전하고 있다.

스승의 말씀에, 황당한 표정으로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 앞에서 성체를 축성하시는 예수님은 죽음과 배신으로도 소멸되지 않는 예수님의 강하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운 사랑을 표시하고 있다.


예수님 편에서부터 세 제자는 사도 요한 베드로 그리고 유다 이스가리옷이다.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로서 항상 주님 가슴에 머리를 기대로 있는 자세의 요한은 베드로의 질문에 응하기 위해 고개를 베드로 쪽을 향하고 있다.

당황한 베드로의 표정은 그의 급한 성격을 너무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비록 주님으로부터 제자단의 으뜸으로 뽑혔지만 스승의 비밀은 아는데 있어선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기 제자단에 막내이나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요한이 이 비밀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에 손짓으로 요한을 가까이 불러 그의 귀에 대고 이 배반자가 누구인지 주님께 물어보고 알려달라고 했다.(요한 13, 23- 24)

베드로의 다른 손에는 푸른색의 칼이 쥐여져 있다. 복음엔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유다의 사주를 받은 병정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에 주님을 변호하기 위해 한 병졸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는 내용이 있는데(18,10) 이것을 상기시키듯 베드로는 바로 자기 수준으로 주님께 대한 충실성의 표현으로 칼을 움켜쥐고 있다. 그는 결국 겁에 질려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나약함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 다른 편에 있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요한을 가까이 불러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베드로를 응시하고 있는 수염투성이의 사내는 바로 유다이다. 최후의 만찬을 다룬 많은 화가들이 유다는 배반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제자단에서 빼어놓거나 아니면 제자들을 등지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으나 작가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그리면서도 그의 자세와 표정으로 그는 배반자임을 전하고 있다.

유다는 오른손에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는데, 이것은 스승을 팔아넘긴 대가로 받은 돈 삼십 은전이다. 자신의 어둔 마음에서 시작된 암계를 다 알고 계시는 스승의 말씀에 다른 제자들이 너무 당황해하는 사이에 그는 자기도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베드로와 요한 쪽을 향하고 있다. 작가는 이 배반자를 제자들과 함께 그리면서도 그의 몸짓과 표정을 통해 그는 이미 제자단과 결별한 배신자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왼손으로 앞에 놓인 빵을 집으려 하고 있다. 베드로의 부탁을 받은 요한이 주님께 누가 배반자인지 물었을 때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요한 13, 24- 27) 주님께 빵을 적셔 달라고 하기 위해 빵을 집으려 하고 있다.


주님 곁에 제자는 토마스 큰 야고보, 필립보가 나란히 있는데, 토마스는 스승의 충격적인 말에 놀람의 표시로 손가락을 들고,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 묻고 있다. 이 손가락은 참으로 그에게 큰 상징이 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의 상처받은 옆구리에 바로 이 손가락을 넣어본 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했다.“(요한 21, 24- 29) 이것은 성서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는 신앙고백이며, 작가는 신앙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 여정에서 여러 고통이 있지만 제자의 배신과 배반을 생각하는 이 순간은 그분 삶에서 어떤 신체적 고통이전에 사랑의 배신이라는 심리적 고통의 순간인데, 작가는 참으로 주님의 심리를 너무도 심원하면서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르코 15, 34)하신 순간과 또 다른 고통, 즉 자기의 분신처럼 여기며 사랑했던 사람으로 부터의 배신을 감지했을 때의 표정이다. 극도의 고통이나 슬픔은 인간의 감지력을 마비시키기 마련이어서 여기 주님 표정 역시 무표정과는 다른 한 인간으로서의 감지 수준 이상의 슬픔에 잠긴 인간의 모습이다.

배신당한 사랑은 복수와 절망으로 이어지는 법이나 예수님은 이 순간 성체성사를 통해 자기를 철저히 배신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는 사랑으로 승화시키셨다. 이런 면에서 이 모습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승화된 얼굴의 모습임이 드러나기에 심원한 감동을 준다.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슬픔의 순간을 이렇게 세밀히 묘사한 것에서 작가의 심리적 심오성이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 이 작품에 근거해서 요 몇 년간 온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던 “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의 작가는 이 작품의 사도 요한을 막달레나로 주장하면서 중세기 있었던 시온 수도회 사건이나 여러 가지를 그럴듯하게 조합해서 매끈한 깜짝쇼를 연출했는데, 이 황당성은 너무 간단히 드러난다.

먼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단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는 자리에 열두 제자 중 하나를 제외하고 막달레나를 끼웠다는 것은 정상적 사고의 발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다.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방법으로 작가는 사도 요한의 예쁘장한 얼굴의 표정과 복장을 제시하면서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기에 이 인물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주님께서 부활 후 가장 먼저 찾아가셨던 막달레나(요한 20, 11- 18)라는 단정을 내리면서 그 황당한 신성모독으로 잠시 독자들을 끌고 갔으며 아직도 이 지적(知的) 사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르네상스는 너무 신적인 것만 강조했던 중세 분위기에서 전환을 위해 인간성의 재발견으로 방향선회를 하면서 예술 역시 과거에 표현할 수 없었던 인간의 신체 부분을 과감히 표현했으며 나체까지 서슴없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희랍조각에 나타나고 있는 미소년의 표현이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의 모든 것을 잘 소화한 작가는 사도 요한이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불린 (요한 13, 24)것과 제자단의 막내이며 독신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미소년의 모습으로 그렸는데, 다빈치 코드의 작자는 이것을 엉뚱하게 각색해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성적 표현이 과거와 전혀 다르게 돌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장이나 화장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힘든 유니섹스(Unisex) 풍조를 위시하여, 근육질의 남성적인 것과 매끈한 피부와 세련된 곡선의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통합된 메트로 섹슈얼(Metro-sexsual)이라는 새로운 남성 패션이 생기고 있는 현실에서, 작가의 주장은 무지의 수준을 넘어 세상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촌스러움으로 다가온다.

근래에 와서 예수님께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각색한 것들이 자주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인들이 자주 빠지고 있는 큰 잘못에서 연유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아무 의심 없이 그냥 믿어야 할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에 대해 일단 의심을 하는 것이 새로운 삶의 모험인양 착각하는 예가 많다.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유혹해서 큰 오류의 늪에 빠트린 사건이 바로 “다빈치 코드”라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조심해야 할 현대적인 병폐의 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 작품이 주는 좋은 교훈이다.

이런 엉뚱한 착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고에 혼란을 일으킨 다빈치 코드의 작가가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눈을 떠서 언젠가 자기 손으로 자신이 저지른 지적인 무지와 사기에 대한 반성 차원의 글을 남기기를 기대한다.

 

이 작품은 제작 당시부터 훼손되기 시작해서 여러 단계에 걸쳐 복원을 했으나 항상 선명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데, 이 아쉬움을 보완하기 위해 16세기에 복사본으로 남긴 것이 이태리 통겔로(Tongerlo)에 있는 다빈치 미술관에 있는데, 원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제자들은 오른쪽으로부터 바르톨로메오 , 작은 야고보, 안드레아 , 유다, 베드로 , 요한 과 토마스 , 큰 야고보, 필립보 ,마태오 ,유다 타대오, 그리고 시몬의 순서이다.

해설: 이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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