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과 생활] 

믿음의 동기와 유래(3)

 

 

 

유성준(兪星濬, 장로)

 

    1905년(乙巳) 여름 4월 중순 어떤 날밤 꿈에 한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너의 유형이 특사 되었다 함으로 꿈을 깨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형기가 아직도 1년 3개월 (3년에서 감1등하여 2년 6개월)이나 남았으며 또 중형은 동경에 있어 역적이라는 이름도 풀리지 못하였고 친척간에 주선하여 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더구나 역적의 동생으로 귀양온 자를 누가 구조하여 특사될 리가 있으리요. 꿈은 참 허사로다 하고 성경을 읽다가 유연(悠然)히 남산을 바라보는 즈음에 한 학생이 선생님 선생님 부르면서 전보 한 장을 가져다준다. 바쁘게 떼어본즉 과연 어젯밤에 특사령이 내렸다는 자부(姉夫) 류정수(柳正秀)씨의 전보이었다. 그때에 곧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드리고 자연히 눈물이 흐르는 중 학도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어찌 이별할가 하고 호곡하며 교우들은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일변으로 감사한 기도를 드리며 일변으로 상경하지 말고 이 고을에 거주함이 어떠한가 하고 권면하는 이도 있었다. 그 이튿날은 나의 장자 각겸(珏兼)이 서울로부터 내려와 그 이튿날로 발정코자 하였으나 모든 교우들과 학생들의 만류로 하로 이틀 하는 것을 열흘을 지난 후에야 부득이 섭섭한 눈물로 이별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후 집안 사람은 사도(邪道)를 믿는다하여 극력 반대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회개하고 장녀 각경(珏卿)을 이화학당에 입학케 하였다. 그때로 말하면 경향을 물론하고 상중계급의 가정 여자로서 규문을 나와 거리에 다니는 자 한 사람도 없음으로 친척고구가 모두 반대하고 훼방하여 사교 믿는 자의 패리(悖理)한 행위라고 핍박이 자못 심하였으나 조금도 개의(介意)치 아니하고 도리어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류정수씨가 종용한 곳에서 진정으로 은근히 권유하는 말이 이제로부터 길을 고쳐 선세의 옛업을 회복함이 옳지 아니한가 또 정부에서 사교를 믿는 자는 등용(登庸)치 아니하니 그리스도교를 그만두고 환로(宦路)로 나오라 함이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위반할 수 없을 뿐더러 벼슬을 얻고 못얻음도 하나님의 뜻에 있으니 어찌 인력으로 하리요 하고 벼슬은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고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제씨의 권고를 좇아 연지동교회에 입참하여 세례를 받고 게일박사와 함께 순조선문 신약을 선한문으로 교작(交作)하는 일에 종사하며 일변으로 배재학당 한문교사로 한 주일 여섯 시간씩 교수하고 유쾌하게 지내어왔다.

    그해 12월에 갑자기 내부로서 경기도 통진 군수의 임령이 있다. 오랫동안 궁굴하였던 남아에 영광이 아님은 아니나 당시 사정으로 생각하면 군수의 박봉으로는 도저히 가족의 생활과 기타 각항 비용을 지당할 수 없고 도리어 공금을 다리여 쓸 염려가 있음으로 굳게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1906년(丙午) 이른봄에 내부 경무국장의 임명이 있는 고로 명령에 유하야 복무하는 중 그해 구력 5월 단오절을 당하여 궁내부 장례원(宮內府掌禮院)의 통첩이 있다. 비서관 오재풍(吳在豊)씨가 와서 말하되 만일 제관을 사퇴하면 면관류형(免官流刑)하는 등록이 있다 한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리스도 신자라 면관류형(免官流刑)을 당할지언정 제관도차의 명은 봉행(奉行)치 못하겠으니 이 뜻으로 장례원에 회답하라 하였더니 영능 제관도차는 경무국장 당직인즉 회피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엄절한 통첩이 또 왔다. 오비서관이 황겁하여 통첩을 가지고 와서 말하되 만일 일향 회피하면 엄벌을 당할터이니 순종하여 곧 행함이 좋지 아니하냐 함으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 신자는 자기 조선의 제도 폐하고 행치 아니하는 고로 이를 사퇴함이오 회피함이 아니며 또 경무국장의 당직이라 함은 장례원에서 자의로 정한 것이오 법률칙령으로 정한 직임이 아니며 만일 영능 졔관도차가 칙령으로 경무국장 직무를 정한 조례가 있으면 당초 이 직임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제관도차로 인하여 면관류형의 엄명을 당할지라도 이 명령은 봉행치 못하겠다 하고 이 뜻으로 장례원에 회답하라 하였더니 그 명이 철회(撤回)되고 말았다. 그후 내부 지방국장, 학부 학무국장, 내부형판, 내각 법제국장으로 있을 때에도 각능 도차제관의 통첩이 있었으나 다 사퇴하였다.

    그해 가을에 정부대관 몇몇 분이 서대문밖 어떤 대관의 집에 모여 청하는 고로 가본즉 여러분이 은근히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 형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만회할 무슨 좋은 방책이 없느냐 함으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의 용렬한 재주로 무슨 승산(勝算)이 있겠습니가만은 여러분이 허락하시면 오직 한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전의 잘못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구할 도리가 있으리라 하고 일장 전도를 한즉 좌중이 혹 옳다하는 이도 있고 혹 눈을 부릅뜨고 보는 이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한 사람도 믿은 자는 없었다.

    1907년(丁未) 가을에 정부에서 을미(乙未)정변에 망명하였던 모든 사람의 억울함을 알고 불러 돌아오는데 중형(仲兄)도 집에 돌아와 함께 단락한 생활을 하는 중 주를 믿으라고 권고한 결과 회개하고 참 진실히 믿었다. 그후 별세하시는 날에 광채가 온 집을 둘러싼 이적이 있었다. 벼슬 다닌 후로 각 연회에서 술을 강권하는 자 많이 있었으나 이것을 일절 거절함에는 적지 않은 곤난이 있었다. 충북도 참예관으로 있을 때에는 사내 총독이 와서 도내의 고등관으로 향연(饗宴) 할 적에도 총독이 친히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였더니 일반은 너무도 고집하는 자라고 지목하였다.

    1916년(丙辰) 4월에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였다가 1921년(辛酉) 1월에 휴직하고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그해 5월에는 안동교회의 장로에 피선되어 교회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중에 세상사람들은 말하되 지금 연소한 후진들은 다 도지사로 승진하는데 오직 유장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국에 혐의를 받아 승진치 못한다고 조하였다. 그러나 나는 종교신앙이 벼슬하는데 무슨 방해가 되리요 하고 오직 예수 십자가의 은공을 감복하고 신종하며 자기 육신에 대하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종용히 처리하여감은 실로 성질이 급하던 나로서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다만 넓으신 하나님의 은총만 감사할 뿐이었었다.

    나의 성질이 크게 변화된 사실을 들어 말하자면 청주(淸州) 있을 때에 여름철 어느 날 관청에서 늦게야 나와 저녁을 먹는 즈음에 하녀(下女)가 숭늉을 가져오다가 잘못되어 머리로 석유등을  떠받쳐 그 등이 내 밥상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다 파열되어 먹던 음식에는 석유가 혼합되고 방안에는 유리조각이 흩어졌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놀래어 어찌 할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퍽 순한 음성으로 하녀(下女)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곳에 서서 움직이지 말라 유리조각이 너 벗은 발에 찔릴가 염려된다 하며 일변으로 다른 하녀(下女)를 시켜 등불을 켜고 방을 쓴 후에 하녀를 내보내고 다른 자리로 옮겨서 식사를 필한 일도 있으며 또 경성에 온 후 하루는 김운양(金雲養) 선생의 병보(病報)를 듣고 심미산종순(沈彌山鍾舜)씨와 작반하야 문병차로 계산학교 운동장을 지나는 때에 학생들의 차는 공이 갑자기 나의 미간(眉間)에 와 맞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향하여 힐책할 의사가 없이 그대로 지내가다가 생각한즉 가만히 지내가고 말면 청년학생들의 장래를 그릇되게 한가 염려하여 학생들을 불러놓고 나직한 음성으로 경계하기를 내가 공에 맞은 것은 그대들의 일부러 한 일이 아닌 고로 잠잠하고 지나가고자 하나 나이가 이미 성년이 지난 그대들이 한마디도 사과함이 없음은 상식 있는 현대 청년의 큰 잘못인즉 내게 대하야 사과 아니함을 책함이 아니라 이후로는 어떤 사람을 대하야 어떤 과실이 있든지 사과하는 뜻을 표하는 것이 문명한 인사의 당연한 도리라고 가르쳐 준 일도 있으며 또 간혹 노동하는 동포에게 욕설도 듣고 젊은 동포에게 업신여김도 받았으나 태연히 지나가고 가끔 육신으로 좇아나는 세상욕심이 발할 때에는 곧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물리치고 지내어왔다.

    1926년(丙寅) 7월 14일 오후에 신문기자 한사람이 찾아와서 나더러 충청남도지사에 임명이 되었더라고 하면서 하례를 함으로 나는 대답하기를 이것이 오전이라 하고 좌상의 객들도 의아하였다. 날이 저물 때에 각처 신문이 왔는데 열람한즉 과연 허언이 아니라 당국에서 바리지 아니하는 후의는 감사하나 나이가 70에 가까워 사무에 게으르니 한 도의 호번한 일을 감당치 못하여 민중의 복리를 증진함에 방해가 된다면 도리어 사퇴하는 것이 옳지 아니할가 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후 주의 십자가의 도가 자기만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닫고 늙은 몸이나마 도민을 위하여 진력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부임하는 즈음에 한 친한 벗이 와서 종용히 권하되 지위가 도백(道伯)에 이르렀으니 충청남도에 부임한 후로는 예배당에 다니지 아니하는 것이 체면에 합당하다 함으로 나는 대답하기를 그대의 후한 뜻은 비록 감사하나 예수교의 신앙은 권모도 아니며 정적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여 구원 얻는 도니 이 정도를 위패하고 어찌 직임에 성심을 다하여 민중을 구제하리오. 이번에 더욱 자기만 위하여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옳지 아니함을 기도하는 중에 더욱 깨달음이 있노라 하고 부임하여 주일이면 예배당에 출석하면서 도청에 진퇴할 때도 항상 기도하였다.

    1927년(丁卯) 5월 17일 강원도지사로 전임되어 우금까지 봉직하는 중 각군을 순찰할 때에 어느 고을에 가든지 목사가 찾아와서 설교를 청할 때에는 수행원들은 여러날 먼길에 피로한 늙은 몸을 염려하여 허락지 아니함이 옳다할 뿐더러 나의 생각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으나 어찌 육신의 편의를 도모하여 하나님의 참 이치를 선전치 아니하랴 하고 그 청구대로 응낙하고 출석한 후 첫번 말을 내일 때에는 심히 힘이 없으나 뜻밖에 굳센 힘이 솟아 나와 한시간 이상을 큰 소리로 강도하나 조금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복음은 신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것을 더욱 깨달았다. 내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후로는 감히 거짓말을 하거나 악한 일을 행치 못하였으며 간혹 아름답지 못한 사상이 떠오를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반성케 하는 은혜를 얻음으로 공자의 이른바 [소인은 능히 선을 하지 못하고 군자는 악을 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예수의 이른바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선인이 악을 행치 못한다] 하신 말씀과는 차이가 있는 점을 발견하였고 또 신자에게 대하여 구주 예수의 십자가 공덕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날 뿐 아니라 영원히 있음을 확실히 믿는 동시에 전세계 동포가 다 회개하야 예수의 참 도리를 믿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움으로 하나님의 공정인자하신 무한한 은혜를 입어 공존공영(共存共榮)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아멘.

    * 이 수기는 <기독신보> 1928년 6월 27일부터 8월 8일까지 7회에 걸쳐 게재된 유성준 장로의 신앙수기이다. 맞춤법을 따라 고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