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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송나무가 서 있는 양가누꼬 호수

Red pine tree by the Lianganuco Lake/Yunice
 
리마에서 가까운 완카이요와 푸노, 그리고 와누코에서 벌어지는 마을축제에 끼어보고 싶었는데 일정이 맞질 않았다. 그 지방의 수호신에게 바치는 축제에서 쓰고 나오는 가면들은 기념품 가게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산을 비는 야릇하고 섹시한 옛 잉카의 도자기 작품들과 면직 박물관을 돌아보고, 양가누꼬 호수(Llanganuco Lake)를 향해 색다른 모험 길에 들어섰다.

우리는 얼굴이 검게 탄 택시기사 프란치스코의 운전솜씨만 믿고 융가이에서 동쪽으로 25km의 꼬불꼬불 언덕길을 좁은 대관령 아흔아홉 고개를 넘듯 숨 가쁘게 올라갔다. 한 시간 가까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안개비를 헤치며 이윽고 양가누꼬 호수에 닿았다.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미끄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려 우리 앞에 우뚝 서있는 큰 검은 바위를 올려다보니 현기증이 나고 섬뜩했다. 빙산과 만년설로 덮여 있는 와스카란 봉우리가 우리를 노려보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래로 해발 3,800미터에 자리잡고 있는 호반은 지쳤다는 듯 태고의 정적에 잠겨 있고. 30년 전 이곳을 흔든 대지진이 생각나 더 으스스해진다. 호숫가엔 아름다운 적송나무 한 그루가 어둠을 헤치며 구부정하게 서 있다.

프란치스코가 붉은 소나무 아래로 가더니 담배 한 가치를 높이 들어 올리고 머리를 조아려 기도한다. 누구에게 무얼 빌었느냐니까, 페루의 신이며 그의 신인 빠자마에게 우리가 이 산을 내려갈 때도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단다. 우리도 마음속으로 같은 기도를 했는데.

호수 물빛에 그림자를 드리운 그 붉은 소나무는 생명의 나무 같아 보인다. 무사히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미소를 억지로 띠우고 호숫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 호수도 하늘도 잿빛인 이 양가누꼬 국립공원 숲보다 더 진한 검정빛 얼굴 하나가 튀어나와 다시 한 번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젊은이는 옥수수(쵸클로)장사였다. 자기를 언덕 아래까지 태워주면 쵸클로를 거저 다 준다고. 꼬스코에서 맛 들여 매일 먹던 유난히 달콤한 초클로를 그날은 구경도 못한 터에 침부터 넘어가 모두들 반기며 태워주었다.

공원이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데, 그날 손님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30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어느덧 그가 살고 있는 작은 움막집 앞까지 내려왔다. 1970년 지진 때, 와스카 봉우리의 빙설이 양가누꼬 호수 위로 내리꽂자, 호수의 물살이 아랫마을 융가이 마을을 덮쳐 집과 주민들이 불과 4분 안에 모두 휩쓸려 사라졌다. 그때, 그 젊은이는 마침 어머니와 이 호숫가에 있었다. 어머니는 팔려고 이고 나온 쵸클로 광주리를 내던지고, 다섯 살 박이 아들을 품에 안고, 물살을 피해 이 적송 나무위로 기어 올라갔다. 아무리 소리쳐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가 사흘 만에 헬리콥터에 발견되어 그 생명의 나무에서 내려왔다는 것. 그 후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결혼했는데 딸 셋을 낳은 마누라는 보따리 싸서 나가버리고, 그는 삶은 옥수수를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 무어인 같이 얼굴 검은 마태오가 자기 오두막집에 들어가자고 하는 걸 억지로 떼어놓고 사진만 찍은 다음, 안 받겠다고 그는 버텼지만 옥수수 값을 거의 두 배로 쳐서 주고 작별했다.

구약시대의 소돔성보다 더 빨리 물 속에 사라진 도시의 모습을 보려고, 다음날 아침 일찍 융가이에 가보았다. 온갖 부요와 환락을 누리다가 ‘상전이 벽해가 된’ 융가이 마을은 햇빛 속에 언제 그런 비극이 있었느냐는 듯 푸르기만 하고, 두 마리의 하얀 점박이 망아지가 정답게 속삭이며 들판에 서 있다.

풍요롭던 마을 터는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조각상과 문 앞의 나무십자가 그들이 생전에 몰랐던 하느님의 위로를 보내주고 있었다.


Old Yungay, now  Cemetery
발행일 : 2009.11.02    기사발췌 : http://www.koreatimes.net/?mid=kt_opinion&category=44964&document_srl=48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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