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 8
글을 쓰는 예수의 데레사
글&사진 Yunice
우리 삶의 여정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 부모나 형제자매와 함께, 배우자 혹은 친구와 함께. 그 동반자들은 거의 나를 이롭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그중에도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해주는 영적 여정의 동반자,기도할때마다 옆에서 들어주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16세기 스페인 아빌라의 성녀, 저술가이며, 교회박사, 영성가인 예수의 데레사는
‘주의기도’ 풀이를 한 그의 책 “완덕의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사랑하시는 님과 단둘이 정답게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시간을 갖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 한가. 기도없는 인생은 잃어버린 인생이고, 참다운 기도만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길이다.”
데레사 성녀의 또 다른 책 “영혼의 성”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는 그 궁성의 문에 드는 것이 곧 기도라고 했다. 나는 그 성에 들어가 일곱개의 궁성을 드나들며 극기의 물을 길어올리는 데레사의 모습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에서 느꼈다. 신비스런 연못들과 우주의 상징같은 천정과 뜰을 탈레가의 달빛 어린 기타소리에 젖으면서.
중세기의 로마가톨릭교회가 타락과 부패의 길로 치닫자, 그 잘못을 뉘우치고 초대교회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 박는 사건을 위시해서 쯔빙글리, 장 칼뱅, 존 녹스등의 종교개혁이 유럽 일대에 불붙는다.
그들의 개혁사상은, ‘다섯가지 오직’ Five Solas로 요약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믿음 Sola Fide Sola Fide /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Soli Deo Gloria
이 모든 운동은 ‘오직 회개’를 전제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중세기교회의 부패상은 비대해진 현대 한국기독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연상 시킨다.아프칸 선교와 피납사태’이후로 극치에 이른 느낌이다. 이에 대해 김형태 목사, 유경재목사 등의 원로목사님이 ‘참회의 기도모임’을 주도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새로운 영성으로 거듭나는 교회로가려는 새로운 다짐에 희망을 걸어본다.
중세기의 가톨릭교회는 마틴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자극 받아 유럽 안에 많은 영성운동이 일어난다. 꺼져가는 심지에 다시 한번 불을 당겨주는 역할을 하듯이.혹은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야고보성인이 옛날 이베리아 반도에 점령한 이슬람 세력을 물리쳐 주었던 큰 신비의 힘을 다시
나누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반개혁주의에 앞장 선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예수회를 창설하여 타락 하는 교회와 사회를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회복하는
'영성훈련’ Spiritual Exercise운동을 펼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맨발의 여성 수도원’을 성공적으로 끌어 온 아빌라의 ‘예수의 데레사’는
'영혼의 벗, 십자가의 요한’과 협력하여 개혁가르멜의맨발가르멜수도원’을 세우고 이끌어간다.
‘예수의 데레사’는, 어느날 교회에서 기도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을 보고 뜨거운 감동으로 자신의 냉담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관상의 기도’로 침묵과 고독 속에 묵상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고 영성을 새롭게하는 기도를 스스로 체험한다.‘치마 두른 어거스틴’이란 말을 듣기도 하는 ‘예수의 데레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치열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남성처럼 용감하면서도 미모였던 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단벌 초상화를 너무나 밉게 그린 후안에게, “후안 수사님, 주께 용서를 빌어야겠습니다. 나를 그린다고 미운 눈꼽쟁이를 그려 놓았으니.” 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겸손, 겸손, 또 겸손!”을 가르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개혁가르멜 수도회’로 인한 박해에 저항하고 자신에게 채찍하면서 고행과 희생을 감수한 성녀 데레사는,
1582년 67세에 중병이 들자, ‘20년만에 평안히 누워본다’고 말하고, 사모하던 님과 영혼이 일치하는 기쁜순간에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고 말하면서 토르메스강이 보이는 암자에서 선종한다. 40년후에 성녀로 시성되고, 400년이 지난 1970년에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여성 최초의 교회박사 칭호를 받는다. 이렇게 성녀 데레사는 정치, 사회, 종교의 큰 변동과 갈등속에 탐험의 일생을 살았다.
로마 시대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빌라성에 들어서니 성녀 데레사의 뜨거운
사랑의 신비가 전해지는듯한 감동이 일었다.따라갈 수는 없어도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데레사 성녀의집,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은 ‘예수의 데레사’가 아직도 관상의 기도에 머물러 있는듯 조용하기만 했다. 바르셀로나와 몽세라에서 만난 그 많은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만 바르셀로나의 카트리나 수도원에서 온 수녀님들만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처럼 명랑하게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영어마저 안 통했지만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기쁜 시간을 나누었다.
예수의 데레사가 쓰던 일상집기가 있는 미술관에서 그녀의 단벌초상화를 보았으나 그리 밉진 않았다. 큰 열쇄가 천국의 문을 암시하며 보존되어 있었고,십자가의 성요한이 이곳의 고해신부일 때 쓰던 유치원 의자같이 조그만 의자에 앉아 보고 싶었으나 유리장 속에 갇혀 있었고.후안 파비오2세가 성요한에게 보낸 편지와 큰 금빛 성배가 바로 어제 도착한것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아빌라에 도착하기 전에 빠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교황 바오로 2세의 장례식 중계에 참여했는데, 몇해전에 이곳을 순례한 교황의 기념초상화가 우리를 정답게 맞아주었다.
뒷마당엔 구들장 같은 일곱개의 대리석조각이 I에서 VII까지 부호처럼 새겨있고,일 곱번째 돌앞에 십자가상과 작은 제단이 놓였다. 십자가에 이르는 칠층산의 고통을 표시한걸까?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쓴 자전소설 ‘칠층산’인가? 그러나 그 숫자가 레사 성녀가 지은 “영혼의 성”에서 겪은 ‘일곱개의 궁방’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몹시 궁금해서 관장수녀님에게 물어보려고 교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뜻밖에도 그 수녀님은 조용한 교회 제단 앞에 앉아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홀로 기도하고 있어서 물어보지 못하고 나왔다.
밖엔 장난감 같은 관광열차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데 비해서 관광객이 적어 이 버스를 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우리가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에서 성녀 '예수의 데레사’를 만나고 나오도록 그대로 서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