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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북촌문화포럼창립총회에 참석하고 참석소감을 본인이 관리하는 KG 51 Cyber Plaza에 올리고 다른 또한곳의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안동교회가 북촌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많은 교인이 북촌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안동교회의 입장에서도 북촌은 매우 중요한 지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수 있어 교회홈페이지에도 북촌문화포럼창립종회관계글을 올립니다. 글의 대체적인 줄거리와 내용은 최초로 올린 KG 51 Cyber Plaza의 원고를 기본바탕으로 하고 교회라는 특성을 살려 약간의 첨삭을 했읍니다. 그리하여 안동교회에 올린 원고는 북촌문화포럼의 어수선한 창립총회장서 안동교회Version으로 부쳐 보았읍니다.> 北村文化포럼의 어수선한 創立總會場서 (안동교회Version) 1월27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北村文化포럼창립총회에 참석했다. 주일오후1시부터는 Girl Scout회관서는 Internet 기초강좌가 Internet 선위원회주최로 열렸고 2시부터는 북촌문화포럼창립총회가 가회동동사무소회의실서 열렸는데 Internet강좌에 참석해보니 강의내용이 너무초보수준이어서 이정도면 북촌문화포럼창립대회찬석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가회동동사무소로 향했다. 北村文化포럼이란 우리들의 住居環境이 급격하게 변모하여 情趣어린 우리들의 터전이 소리없이 살아져 가는 세태속에서 北村을 格調높고 文化의 香趣와 雰圍氣가 살아 숨쉬는 空間으로 보존하자는 취지로 몇몇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며 방법을 찾아보자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北村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꿈을 키웠고 장성한뒤에도 반세기를 넘게 한 곳을 떠나지 않았으며 北村을 雅號로 까지 정하고 주변의 친구들이 北村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흐뭇이 여기는 내가 어찌 이런 모임을 빼놓을 소냐. 그러나 시간에 맞추어 총회장에 나가 보니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北村의 한복판인 嘉會洞과 그주변의 주민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北村文化포럼의 창립총회에 관한 기사가 朝刊新聞에 보도되자 지역주민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兪璟在담임목사를 비롯하여 邊昌培목사 尹商求장로 曺箕鉉장로 이진구집사 송호윤집사 문창하권사등 안동교회교우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포럼준비위원이 마이크를 잡고 개회를 시작하려고 하자 진을 치고 있던 주부중의 한사람이 일어서더니 "누구마음대로 北村을 들먹거리느냐? 이곳은 우리의 私有財産(家屋)이 자리한 우리동네다.우리들의 私有財産權을 함부로 제한하거나 간섭하지 말라 "고 거센 말투로 포문을 열었고 여기저기서 벌떼같이 볼멘소리가 터졌으며 주민대표가 나서서 한꾸러미의 서류뭉치를 들척이면서 선동조의 연설을 시작하는것이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어디 사는 누구냐? 살기좋은 아파트지역서 온갖 편의시설의 혜택을 누리며 好衣好食하고는 韓屋保存하겠다고 우리를 못살게 하려느냐" "그렇게 北村을 좋아하고 韓屋을 사랑한다면 여기와서 살아 봐라. 여기와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韓屋保存을 왜칠수 있울것 같으냐."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속아왔다. 이제는 文化藝術운운하면서 속이려고 하느냐? 당신네들이 문화예술이라고 하는데 文化藝術協會(이런 이름의 단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한 사람이 발기인중에 도대체 몇사람이나 되는지 나와봐라. 서울시 앞잡이노릇 하면서 무슨 文化藝術人이냐" "北村,北村하는데 명칭부터 바꿔라. 당신네들이 北村이라고 떠들어대니까 친구들모임에 나가면 촌놈왔느냐고 놀려댄다. 서울에 있고 청와대가 바로 옆인데 村이라니 말도 안된다. 왜 서울사는 우리들을 멀쩡하게 촌놈으로 만드느냐. 北村文化포럼이라는 이름부터 嘉會文化포럼으로 당장 바꿔라" 여기저기서 속사포처럼 쏟아진 항변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北村居住者였음으로 주민들은 거의가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사회자로서는 사태를 수습할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兪璟在목사가 마이크를 잡고 "우리들은 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이고 순수한 민간모임으로 北村을 위해 의논하려는 모임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했으나 주민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1시간여의 소란이 계속된 끝에 창립총회는 일단 유회가 선포되었다. 지역문제를 둘러싼 지역주민과 행사주최자가 대치한 전형적인 갈등의 현장이었다. 嘉會洞 洞事務所서의 창립총회가 주민들에 의해 무산되자 文化포럼발기인들은 尹商求長老宅에 다시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다. 尹商求장로가 포럼의 발기인이자 운영위원이었고 尹長老宅은 행정구역으로는 安國洞에 속하지만 선친인 尹潽善대통령이 내장을 손수 고안하고 디자인한 체취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고 얼마전 서울시에 의해 史蹟地로 지정되었으며 北村地域의 가장 대표적인 韓屋으로 손꼽힘으로 총회장소의 변경은 갑작스럽고 예정에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 총회장소변경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한 주민들이 尹長老宅까지 몰려와 항의소동을 벌이지는 않아 총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준비단계서부터 모임을 주도하여온 梨花女大美術大의 여교수가 대표로 추대되었고 창립선언문도 채택되었다. 창립선언문은 급속하게 진행되는 도시화의 급물살속에서 서울서는 옛모습과 傳統文化의 자취를 가장 많이 지니고 있다는 北村마저도 옛情趣를 급속이 잃어가고 있음을 안타까히 여기며 北村의 제모습을 소중하게 가꾸어 文化遺産으로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염려하며 힘을 모으기 위해 모임을 결성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표로 추대된 여교수가 북촌문화포럼이 발족부터 북촌에 뿌리를 내린다는 상징성을 보여 주려고 동사무소의 회의실을 창립총회장소로 선택했는데 지역주민과의 대화와 접촉이 없어 전혀 뜻하지 못한 소용돌이에 휘말린것은 준비위의 실수였다며 허탈하게 인사를 한뒤 참석자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참석자의 면면은 민주당소속 여성국회의원 李美卿의원, 觀光公社의 高位任員, 서울시의 用役을 맡아 北村지역정책개발에 참여했던 大學敎授, 都市計劃專門家, 建築家, 북촌지역에 자리한 畵廊의 운영자, 學藝硏究員, 북카페 運營者, 專門月刊誌의 主幹, 宮中料理硏究家 서울시청의 北村地域擔當팀장. 言論機關의 取材記者등등이었고 北村地域住民도 몇명있었는데 그중에는 北村의 雰圍氣가 좋아 새로 주택을 매입하고 수리중이라는 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교회서는 兪璟在목사 邊昌培목사집주인인 尹商求장로부부 가 참석했으며 北村의 토박이였다가 지금은 타지역에 거주하며 막연하게나마 북촌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나 주일예배에 찬석하여 소식을 듣고는 Internet 기초강좌와 저울질한 끝에 이모임으로 방향타를 잡은 나는 참석자중에서 가장 어정쩡한 입장이었다. 창립총회후에는 그자리서 北村의 길을 主題로 한 창립기념세미나가 열렸다. 그러나 세미나의 발표자와 토론자중 일부는 주민들의 항의소동에 놀라 嘉會洞事務所에서 발길을 돌렸고 이미 시간을 상당히 허송했기 때문에 남아있던 발표자가 10여분 남짓하게 줄거리만 요약하고 내용은 油印物로 대신하며 토론도 간략하게 매듭짓기로 했으나 주최측이 준비했던 油印物조차도 총회장을 선점했던 地域住民이 모두 집어가서 정작 北村文化포럼의 참석자차지로는 거의 남아있지 못했다. 발표요지를 담은 油印物도 없이 진행된 세미나였다. 간추려 발표한 주제를 더 간추려 소개한다면 대충 이렇다. 北村은 서울의 주산인 北岳山밑 景福宮서 昌德宮사이의 주거지역으로 현행정구역으로는 八判洞 昭格洞 司諫洞 花洞 安國洞 齋洞 嘉會洞 桂洞 苑西洞 일원이나 중심은 嘉會洞이다. 北村은 漢陽定都와 함께 宮闕과 인접한 주거지역으로 형성되었으나 朝鮮王朝末까지도 北岳의 줄기가 내려뻗은 野山에 가옥이 드문드문한 聚落形態였으나 이러한 취락형태가 1890년대이후 가옥이 줄을 이어 들어선 본격적인 도시형주거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간행된 서울시지적도에는 現在街路의 기본형태가 들어나 있으며 1920~30년대에는 주택업자에 의해 야산지대가 住宅團地로 개발되고 그곳에 韓屋이 집중적으로 들어서서 오늘까지 韓屋保存地區로 남게 되었다. 北村의 길은 北岳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형성되어 동쪽으로부터는 秘苑담을 따라 흐르는 개천(현재는 覆蓋되었음)과 함께 苑西洞길이 생겨났고 그옆으로 작은 물줄기를 따라 桂洞길 嘉會洞길 安國洞길이 형성되었으며 三淸溪谷을 흐르는 三淸川(현재는 覆蓋되었음)을 따라 三淸洞길이 났는데 물길을 따라 형성된 길들은 北에서 南으로 내리 뻗었고 작은 골목이 동서로 뚫려서 남북으로 내리 뻗은 큰 길을 연결해주고 있다. 물길을 따라 형성된 큰 길은 곧바로 뚫린 직선로 아니라 지형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처럼 휘어지고 굽어진 곡선로이고 곡선로인 큰길을 동서로 이어주는 골목길은 꼬불꼬불한 꼬부랑길이다. 북촌길의 특징은 지형과 물길을 닮아 구브러진 큰길에 꼬부랑골목길이다. 安洞敎會는 嘉會洞길과 安國洞길사이에 뚫린 골목길에 자리했으며 古宮探訪路의 紅峴이 멀지 않은곳에 누워 있다. 安洞敎會가 자리한 골목길은 남북으로 뻗은 큰길을 이어주며 동서로 뚫리지는 않고 큰길과 같은 방향으로 뚫렸으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리 휘고 저리 구브러진 꼬브랑골목길이었으나 가로정비공사에 따라 지금은 거의 직선화되어 지하철3호선 安國驛으로 이어진다. 교우들은 北村의 휘어지고 굽으러진 큰길이나 꼬브랑골목길을 거쳐 교회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이러한 北村길과 골목이 최근 街路整備와 都市計劃에 따라 넓혀지고 直線化되어 嘉會洞길은 24m폭으로 넓혀져 車道와 步道가 분리되고 소나무가로수가 심어지며 北村의 Main Road로 자리잡아 헌법재판소가 들어선 齋洞4거리서 바라보면 監司院이 자리한 三淸公園어귀가 한눈에 들어오고 景福宮서 京畿高의 花洞옛캠퍼스정문을 지나 왼편엔 齋洞초등학교, 오른편엔 現代그룹사옥을 끼고 昌德宮에 이르고 다시 鍾路3街 宗廟로 이어지는 古宮探訪路가 새로 만들어졌다. 古宮探訪路의 초입은 花洞옛校舍正門서 비스듬히 올라갔다가 齋洞초등학교정문쪽으로 내려가기까지가 校歌에 나오는 花洞언덕, 곧 紅峴인데 50수년전 京畿中에 입학한 우리동기들이 학교를 찾아 갔을때 齋洞국민학교에서 완만한 경사로 올라가는 당시의 紅峴은 자동차가 통과할수 없이 좁은 골목이었으나 이제는 고궁을 순례하는 외국관광객이 통과하는 관광로가 되었고 機務司를 교외로 이전한뒤 그자리를 傳統文化藝術空間으로 가꾸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며 선재미술관등 몇개의 民營畵廊이 이미 들어서 Gallery Street로의 변모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街路整備와 擴張過程서 北村의 情趣를 살리고 傳統文化의 자취를 나타내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北村의 길들이 北村의 특징과 분위기를 잃고 있다는 것이 이날 세미나의 핵심지적사항이었다. 北村의 길을 우리의 정취가 배어 있는 전통의 거리로 가꾸어야 한다는 趣旨에 대해서는 당국도 공감하고 街路整備事業에 상당히 반영시키고 있지만 그러한 試圖가 調和롭고 均衡맞춰 이루어지지 않아 豫算浪費와 不調和를 들어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폭이 24m로 넓어진 嘉會洞길 街路樹로 소나무를 선정하여 한그루에 3백여만원씩 들여 安眠島自然樹林서 소나무를 옮겨 심고 돈화문서 종로3가에 이르는 宗廟길은 步行觀光客을 위해 車道를 좁히고 人道를 넓혔으며 人道곳곳에는 걷다가 쉬어 가도록 벤취를 설치했는가 하면 키큰 플라타나스 街路樹아래로 키작은 사철나무를 庭園樹가꾸듯 가꾸어 놓기도 했다. 이날의 세미나서는 이런 것들이 돈만 퍼부운 낭비적인 街路整備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仁寺洞길의 정비가 실패작이었으며 소나무가로수까지는 받아 들이겠지만 鑄鐵菅 街路燈은 소나무와 심한 不調和를 이루어 嘉會洞길의 확장도 失敗作으로 판정난 仁寺洞길 整備의 前轍을 따르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道路鋪裝을 거무티티한 색갈의 콩크리트로 할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색상을 살린 아스콘으로 한다거나 연도에 늘어선 주택의 담장이나 외벽을 벽돌이나 블록담으로 하지 않고 전통토담으로 하도록 권장하고 이를 위해 서울시와 종로구가 지원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그러나 세미나서 제기된 지적과 주장은 지역주민들의 여론과는 상치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嘉會洞길의 확장은 실생활면의 편의성 때문에 관의 시책중 지역주민들로부터 가장 환영받은 것이었는데 세미나서는 비판과 지적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비탈진 꼬부랑골목길은 자가용차가 보편화되어 버린 자동차문화시대에 뒤져 있기 때문에 北村의 밤은 이웃간에 주차를 둘러싸고 시비가 끊이지 않는 주차전쟁의 밤인데 세미나서는 휘어진 큰길과 꼬부랑골목길에 바로 北村의 情趣가 담겨 있는 만큼 그점을 살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토담외벽과 토담담장은 회라던가 황토라던가 하는 재료의 희귀와 기능보유자의 부족으로 공사비가 많이 들고 유지관리도 어려워 이미 70년대와 80년대에 시멘트블록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를 다시 토담으로 되돌릴수 있을까. 요즈음 北村의 토담외벽과 담장은 접객업소의 치장공사에서나 볼수 있을 뿐인데 일반주거용가옥에 권장한다면 호응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최소한으로 축소된 세미나에 참석하여 절감한 것은 싫든, 좋든 北村에 삶의 터를 잡고 살아가는 주민과 北村에 자리한 직장을 다니거나 북촌을 오가며 그 조용하고 차분하게 갈아 앉은 外樣과 雰圍氣에 매력을 느끼는 타지역거주자가 지니고 있는 의식의 현격한 격차였다. 지역주민들의 北村에 대한 의식은 토지개발이익서 소외된 剝奪感과 韓屋保存에 대한 被害意識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타지역거주자의 北村에 대한 의식은 감상적인 복고취미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편익우선사고와 타지역거주자들의 전문가저적인 안목의 상충은 시급히 조정되어야할 문제였다. 지형및 물길과 오랜 세월 調和를 이루며 굽어지고 비탈지고 휘어진 길의 폭을 넓혀 직선화한 것이 傳統聚落形態를 연구하는 건축가들에게는 몰인간적이고 획일적으로 보이지만 주민들에게는 다니기 편하고 자동차의 소통이 편해지니까 좋기만 하며 한옥이 즐비한 거리에 鑄鐵菅街路燈이 도시계획전문가들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지만 주민들에게는 어둡기만 했던 밤거리가 밝아졌으니 좋아 보인다. 三淸公園과 인접한 언덕배기는 쓸어져 가는 구옥들이 비탈길을 따라 게딱지가 처럼 붙어 있던 불량주택밀집지구였는데 최근 재벌그룹에서 지역일대의 가옥을 사들여 외국인용고급임대주택을 짓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이날의 발표자는 北村의 분위기훼손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으나 주민들은 겨울철 눈이 조금만 내려도 다니기 어려웠던 비탈에 외국인용 임대숙박시설이 들어서면 주변땅값이 덩달아 뛰고 주거환경도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러한 의식의 상충과 시각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조정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그러나 地域問題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하고 앞세워야 하는 우선순위는 바로 지역주민의 정서다. 창립총회의 變則開催등 이날 벌어진 일련의 사태도 北村文化포럼이 剝奪感과 被害意識으로 응어리진 住民들의 울분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의욕만을 앞세우고 닻을 올리려다가 돌풍에 휘말린 것이라고 하겠는데 地域住民들간의 葛藤과 對立은 또하나의 걸림돌이었다. 다같은 北村이지만 위치에 따라 이해가 엇갈렸고 그러한 이해의 엇갈림은 미묘한 대립과 갈등으로 표출된다. 苑西洞주민, 桂洞주민, 嘉會洞주민, 三淸洞주민이 서로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이른바 NIMBY현상의 표본적인 사례로 잘게 나뉘다 보니 동네로 갈리고 골목으로 갈리고 나중에는 담을 같이한 이웃집끼리도 반목한다. 지역주민대표의 자격으로 나온 한발표자는 총회장서 반대시위를 한 주민들을 말이 통하지 않고 상종할 수 없는 무리라고 서슴치 않고 매도하는 것이었다. 서울서 유일한 韓屋保存地域인 北村에 요즈음 더러 볼수 있는 住宅新築은 낡은 木造韓屋을 허물고 철근콩크리트의 多家口住宅을 짓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韓屋이 갈수록 줄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가 韓屋新築이나 改補修는 돈많은 有名寺刹이 짓는 布敎堂이나 서울分寺정도이며 남다른 심미적인 취미의 재력가가 절반은 주거용,절반은 과시용으로 아름다운 韓屋을 짓기도 하나 그런 집은 北村을 샅샅이 뒤져야 몇집되지 않는다. 材料구하기 어렵고 維持管理하기 힘들고 煖房이 쉽지 않아 해마다 어김없이 추운 겨울을 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미나에 참여한 건축가들이 함께 머리를 짜내어 北村에 알맞는 현대식 韓屋의 멋진 모델을 제시하고 北村지역주민들이 그모델을 따라 아름답고 편리한 현대식한옥을 짓고 살도록 하는 것이 北村을 北村답게 가꾸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으나 그렇게 해보겠다는 대답을 끝내 듣지는 못했다. 北村에 관하여 간과해서는 안될것은 現代史의 출렁임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현장성이다. 광복전후 北村은 정치1번지였다. 정치지도자들의 자택이 北村일대에 몰려 있어 정치인의 왕래가 많았고 중요한 정치집회가 이지역에서 열렸다. 해방정국서 保守右派의 지도자였던 仁村 金性洙의 자택이 桂洞에 자리했고 仁村宅에서 100여m 거리에는 左派의 風雲兒 夢陽 呂運亨의 자택이 있었으며 고개넘어 苑西洞에는 仁村의 동지이자 우파의 거두 古下 宋鎭宇의 자택이 자리했다. 좌우익의 맹장들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北村의 골목길을 분주하게 오갔다. 夢陽은 재빨리 建國準備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총독으로부터 한반도의 통치권을 인수하겠다고 서둘렀고 仁村과 古下는 保守右翼政黨인 韓國民主黨을 창당했다. 韓民黨의 산실로는 海葦 尹潽善자택이 이용되었다. 海葦宅과 붙어 있는 구 京畿高女(현헌법재판소)강당서는 朝鮮共産黨結成大會가 열렸고 日警에 쫓겨 지하로 잠복했던 朴憲永이 처음으로 광복정국의 표면에 등장한 것이 바로 京畿高女講堂서 열린 朝鮮共産黨結成大會였다. 光復直後의 政治空白期 政治集會場所로 자주 利用된 곳이 齋洞의 舊京畿高女講堂, 桂洞의 徽文學校運動場, 慶雲洞의 天道敎講堂이어서 北村서는 左右翼政治集會의 구호가 그치지 않았다. 미국서 귀국한 雩南 李承晩은 梨花莊에 머물고 上海 臨時政府主席 白凡 金九는 京橋莊을 거처로 삼았으나 중도파인 尤史 金奎植의 거처는 北村의 일각인 三淸洞(현재 總理公館構內)이었으며 軍政廳과 인접한 北村은 國會議事堂이 자리한 지금의 汝의도와 같은 정치활동의 중심지로서 光復政局의 거센 출렁임이 소용돌이친 歷史의 現場이었다. 古下 宋鎭宇가 암살당하여 정치테러의 첫희생자가 된것은 苑西洞 그의 自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복정국의 격랑이 출렁인 歷史의 現場으로서의 흔적이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仁村自宅이 후손들에 의해 仁村紀念館으로 보존되어 있고 海葦自宅이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天道橋講堂이 그대로 남아 있을뿐 三淸洞 尤史의 거처는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總理公館의 구내로 편입되었고 구 京畿高女校舍는 昌德女高校舍로 쓰이다가 현재는 憲法裁判所建物이 들어섰고 徽文學校자리에는 現代그룹의 社屋이 들어섰고 苑西洞 古下自宅은 재벌그룹회장에게로 넘어가 그자리에 새 邸宅이 들어섰다 夢陽이 암살당한뒤 자녀들이 월북한 夢陽의 桂洞自宅은 古宮探訪路확장때 절반이 잘려 나가더니 徽文高옛자리에 現代그룹 社屋이 들어서자 주변동네가 먹자골목으로 되면서 칼국수집으로 둔갑했다. 정치지도자뿐만 아니라 광복이전까지 北村에는 각계의 지도자와 유명인이 적지않게 거주했다. 갑부서열서 1~2위를 겨루던 거부의 저택이 嘉會洞에 자리해서 부자동네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北村한복판에 자리한 齋洞국민학교와 조금 떨어져 있는 校洞초등학교는 해마다 어느 학교가 京畿에 더많이 합격하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어서 1960년대까지는 아마도 京畿에 다니는 남녀학생들이 지역적으로 가장 많이 밀집하여 있던 지역이 역시 北村이 아니었나 싶다. 北村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보내고 몰락의 길을 걸어 지체높은주민들은 강남의 새주거지역으로 빠져나가고 한때는 거의 슬럼가에 가깝게 되기까지 했다가 이제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지역으로 꼽히던 北村도 어제와 비교하면 많이 변했다. 길이 넓어지고 소나무가로수가 심어진것만이 아니다. 監査院이 들어서고 總理公館이 들어서고 청와대 어귀의 길들이 깨끗이 정비되었다. 우리들의 모교를 비롯한 학교가 옮겨가고 그자리에 正讀圖書館 憲法裁判所가 들어서고 金融硏修院 서울市敎育公務員硏修院 南北對話事務局도 자리하고 있다. 三淸洞길초입과 古宮探訪路 주변엔 대형畵廊도 세워지고 三淸公園어귀에는 음식점이 연해 있으며 現代그룹社屋이 자리하면서 桂洞길초입은 먹자동네가 되었다. 전통음식으로 성가를 올리는 韓食店도 여럿이며 古宮探訪路와 嘉會洞길의 언덕백이까지 음식점이 들어서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것같으면서도 끊임없이변화하는것이 우리의 주변이라는 사실을 北村에서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北村은 다시 옛榮華를 되찾을수 있을까. 榮華를 되찾지는 못하더라도 傳統文化의 情趣와 숨결이 살아 숨쉬는 동네로 다시 태어날수 있을까. 北村을 떠나고 나서도 北村한복판에 자리한 安洞敎會에 적을 두고 있는 관계로 주일대예배를 마친뒤면 北村을 한바퀴 휘돌아 보곤하는 나로서 北村文化포럼의 휘청거린 出帆을 지켜 보면서 北村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 보는 것은 北村이라는 雅號를 갖고 있어서 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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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壬午년, 淸溪山 신년 산행기(24, 25차) 김광엽 2002.01.28 1345
1847 하나님이 사람되심은... 최은혜 2002.01.30 1435
1846 인터넷 기초교육 1 정일문 2002.01.31 1572
1845 윤병대 집사 입원 유목사 2002.01.31 1431
» 北村文化포럼의 어수선한 創立總會場서 오도광 2002.01.31 1383
1843 1월의 유머 오도광 2002.01.31 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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