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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4월 27일 부활주일>
   육성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      편   51:10-19
요한복음   21:15-17

  

    요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날 저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 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다 못 잡고 동틀 녘 빈배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게 해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조반을 마친 후에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두 번 더 하셨고,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 것을 말씀하신 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문답을 통해서 그의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는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저들에게 확신을 주셨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의 의미를 같이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의 은총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물음 속에는 은총과 의무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 오셔서 그를 힐책하는 대신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네가 나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은총의 측면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에서 `너'는 죄인인 베드로, 세 번씩이나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 언제나 실수투성이인 베드로, 실의와 좌절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잡이 나왔던 베드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때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비록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결코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라고 강경하게 다짐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하잘 것 없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므로 그렇게 철석같이 다졌던 맹세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느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베드로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베드로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항상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대로 행하지 않고 늘 자기 편리한대로만 사는 크리스찬들, 평소에 그렇게 훌륭해 보이던 믿음의 소유자들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한순간에 그 믿음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와 나의 모습 속에서 다같이 발견하는 인간의 약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이와 같이 모여 예배하는 까닭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시어 인간 가운데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끝가지 고난을 참고 견디심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 그래서 마침내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메울 수 없었던 깊은 간격을 메우시고 인간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하신 그리스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거룩한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그리스도, 그는 지금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시며 마음의 평안과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편은 배반자요, 죄인이요, 실패자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자인데 다른 한편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오, 완전히 낮아지셔서 순종하신 분이요, 십자가의 고난을 끝가지 감수하신 분, 그래서 부활하시어 영광 받으신 분입니다. 이렇게 한편은 너무 낮고 천한 자요, 한편은 너무 높고 거룩한 분입니다. 그 간격은 너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간격을 단번에 뛰어넘어서 베드로에게 오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물으시는 것은 전에는 네가 사랑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담을 헐고 너희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높여 나의 친구가 되게 하였으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과 노예와의 사이에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격이 부여되지 않는 노예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풀어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것을 일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요 15:14-15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를 친구처럼 생각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의 신부로 생각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창녀와 같은 우리를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의 신부로 맞으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그 물음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받는 베드로의 가슴은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그것은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었던 사랑이 넘치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택했다. 내가 너를 친구로 삼았다. 내가 너를 나의 신부로 맞아드리련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질문 속에 포함된 은총입니다. 배반자를 거룩한 자의 친구요, 창녀 같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맞아주시는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오늘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고 계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끝없이 인내하시면서 그의 사랑의 품에 돌아와 함께 사랑을 나누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합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은총임을 깨닫고 그 물음 앞에 성실하게 답변하기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요청

    다음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요청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청하시는 까닭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곳에 참 생명이 있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곳에 참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리와 생명을 얻겠습니까? 자유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유를 얻기를 원하겠습니까? 죽음의 모든 지배와 그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가 부활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갈망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갈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지으신 인간의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그가 지으신 세계와 더불어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까닭이 바로 그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사랑의 교제는 격이 맞지 않는 관계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렇게 하시므로 피조물의 격을 높여주시고 자기 안에서 온전한 생명공동체를 이루시고자 한 하느님의 거룩한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공동체에 들어감을 뜻함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로 격상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른 질문 다 제쳐놓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로 성장하게 하며,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동시에 나를 사랑하라고 요청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곧 세상에 대하여 가졌던 사랑을 모두 버리라는 요청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요일 2:15). 결국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오물(汚物)같이 여길 줄 아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얻기를 원하는 어떤 것보다도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무엇이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신앙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병행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병행시키려는 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간 지대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뜨뜻미지근한 신앙­차지도 덥지도 아니하여 뱉어낼 수밖에 없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전적인 신앙과 사랑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전적인 사랑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서 사용된 사랑이란 단어가 '아가파오'인데, "전적인 사랑", "모두를 주시는 사랑", "완전한 희생을 동반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사랑을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완전히 희생하시고 자기를 주신 그 사랑처럼 너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으로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도 이 '아가파오'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할 일 다하고 나머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할 일이며, 사랑하는 힘이 분산되어서는 안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사랑 모두를 완전하게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적인 사랑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겸손하게 낮아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에게 전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가장 큰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상응하는 가장 큰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감히 '아가파오' 동사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대신 '필로'란 단어를 써서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그전처럼 강경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감히 그러지를 못하였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실행하지 못한 과오를 그는 기억하면서 겸손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정말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도로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전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긍정적인 대답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물음 앞에서 회피하지 말고 겸손하게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대답합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 대답을 실현해 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셨고, 지금도 그는 하느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 충만함을 간구할 때 성령께서 나를 도우시며 나로 주님을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내게 물으실 때 입다물고 있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대답합시다.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할 그런 시점에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수군거리던 제자들과 같이 오늘  불의의 세력 앞에서 두려워 떨며 숨어서 크게 외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고기를 낚으려고 애를 쓰던 제자들처럼, 확신과 소망이 없이 이 역사의 밤에 고기 한 마리라도 낚으려고 헛된 수고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이제 눈을 들어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려고 거기 계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확신을 갖고 세상에 나가도록 우리를 찾아오셔서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죄와 죽음의 절망에 빠진 우리를 건지시고 높이 들어올려 자기의 친구로, 자기의 신부로 삼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그 은총을 기쁨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함으로 겸손하게 대답합시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나 그가 주시는 확신으로 진정 주님을 전적으로 사랑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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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3년 5월 4일 부활절 셋째주일> 육성설교 / 동영상 부활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다 이사야서 65:17-25 요한복음 11:17-27 우연히 인터넷에서 강남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의 부활주일 설교를 ...
    Date2003.05.04 Views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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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3년 4월 27일 부활주일> 육성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 편 51:10-19 요한복음 21:15-17 요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
    Date2003.04.26 Views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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