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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25일 부활절 여섯째주일>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 시 편 18:20-27 |
오늘 읽어 드린 요한일서 3장 1절과 2절에 "하느님의 자녀"란 말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역(私譯)에 보니까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역에는 1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지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세상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어 그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자녀 됨을 특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받은 이런 하느님의 자녀 된 특권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믿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인지를 별로 실감하고 있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대통령의 아들의 친구라거나, 아무개 장관이 나의 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조차도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됨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지금이 아닌 죽은 다음 천국에서 깨어날 때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갖지 못하고 그 품위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녀야 할 순결함과 의로움과 사랑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로부터 초연해야 할텐데, 오히려 비굴하게 굴종하고 있습니다.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여야 할텐데 우리는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자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깊이 생각해 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품위를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큰사랑 요한은 "하느님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에는 하느님의 큰사랑이 역사하였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사랑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여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보내신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큰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 일은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자세하게 그 사랑의 내용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내용을 알기 위해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4-5 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세상 창조 전에 예정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점차 자라서 완성되도록 지으셨는데, 그 최종적인 목표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큰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3절에 있는 대로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됨을 뜻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됨을 뜻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도 하느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육체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 머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적 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과 비슷한 영적 존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요한은 미래의 우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 때에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지각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며(고전 13:12),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서, 하느님의 아들의 자리로 복귀하시어 영광스러운 하느님으로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를 닮은 영적인 존재, 신령한 몸을 입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5:47-49). 그 때에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러나 육체로 태어난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제한적이며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이런 연약한 인간이 자라서 마침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 하느님의 자녀의 자리에 앉기까지는 계속적인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위에 인용한 에베소서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고 그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창조된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에 갑자기 변경된 계획을 따라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하느님의 아들은 이 땅에 오시게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도록 예정하신 일이 바로 하느님의 큰사랑입니다. 3) 그런데 이런 과정 중에서 연약한 인간이 죄의 유혹을 받아서 타락하게 되자,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명은 더욱 커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까지 대속해야 하는 사명이 추가되어 그 어깨에 메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인간이 지향해 가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막고 있었던 모든 죄와 죽음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큰사랑의 결정적 역사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4) 그러나 하느님의 큰사랑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피로 구속된 인간을 계속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실 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 16:13-14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바로 진리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처음 계획하셨던 대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또한 하느님의 큰사랑이 역사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5) 이만큼만 해도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의 사랑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요한은 우리의 하느님 자녀 됨이 특권(特權)이라고 하였는데, 그 특권이 무엇일까요? 그 특권은 바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 이하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하나 되심과 그 하나 되심에 우리도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은 하느님의 거룩한 파티에 우리가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 분리되지 않고, 혼합되지 않으며, 종속되지 않으면서도(No separation, confusion, subordination) 완전하게 하나가 되시므로 이루시는 놀라운 생명의 조화 속에 우리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귐 파티에 참여한다는 것은 파격(破格)이며, 특혜(特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큰사랑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처음에 계획하신 하느님의 자녀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이런 하느님의 큰사랑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란 말속에 담긴 사랑과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그 사랑과 그 주어진 특권에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육체로만 살다가 가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로 완성되는 영적 존재임을 깨달을 때 육체를 중심으로 살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육체로만 살던 때는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살았습니다. 욕망을 중심으로 한 삶은 곧 죄에 매인 삶이며, 죽음의 지배를 받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났다함은 바로 이런 욕망의 삶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됨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육체로 머무는 동안 이 욕망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들로 구별되었기에 그대로 욕망의 삶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요구를 거부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 투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위해서도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붓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피나는 노력을 경주(傾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이 무엇일까요? 오늘의 본문인 요한일서 3장 6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벗어나기 위하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 안에서 숨쉬고 그로부터 생명의 모든 요소를 공급받으며, 특히 그의 삶을 본받고,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감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의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본받음을 뜻합니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요 12:26 예수님께서 가신 겸손과 희생과 봉사의 길을 우리도 함께 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나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나아가게 됨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주한다는 말은 나 혼자 살던 집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으로 이사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감을 뜻합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염려하던 자리에서 벗어나서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고, 오염되어 가는 생태계를 염려하면서 회복에 헌신하는 자리, 미래에 태어날 우리의 후손을 염려하여 그들이 살 수 있는 자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께서 항상 같이 하시므로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느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