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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15일 삼위일체주일> 하느님을 아는 지식 예레미야서 23:16-22 |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이라고 생각되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는 각각 그 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한마디로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느님이 나타내시려는 비밀을 알게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골로새서의 기도를 살펴보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기도로 삼고자 합니다. 골로새서의 기도의 내용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이해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알게되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며, 모든 선한 열매를 맺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자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환난을 참고 견디며 아버지께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좀 더 간단히 요약한다면, 영적 지식이 성장함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요리문답(要理問答)}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이에 대한 답으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바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변화된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뜻을 알아야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열심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경험과 지식은 하느님을 아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추구하며 쌓아올린 경험이나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 지식, 그 이념, 그 사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로 예수를 믿으려면, 일단 자기가 가졌던 경험과 사상을 모두 버리고 빈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그들에게 채워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1:9).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그의 뜻을 어디에다 나타내셨을까요? 하느님은 그의 뜻을 그가 창조하신 세계와 그리고 그의 말씀인 성경에 나타내셨습니다. 창조하신 세계에 나타내신 것을 '일반계시'(一般啓示)라고 하고, 성경에 나타내신 것을 '특별계시'(特別啓示)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그의 뜻을 그가 지으신 세계 속에 분명하게 나타내셨지만, 사람들이 죄를 짓고 그 마음이 어두워지므로 해서 그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특별 계시를 주셔서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가운데 환히 드러나 있지만, 우리의 지식이 죄로 말미암아 흐려졌기 때문에 그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저들에게 자기의 뜻을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고, 마침내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구원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 1:1-2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그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그 영적 지각력(靈的 知覺力)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먼저 분명하게 깨닫고, 그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내야 합니다. 죄사함 없이는 아무리 분명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된다는 사실조차도 우리 스스로는 깨달을 수가 없어서 결국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모시고 그의 말씀을 들었고, 또 그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하였음에도 그들이 그 말씀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며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들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저들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하여 그들 자신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그 모든 구원의 비밀들을 밝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회개(悔改)란 바로 지난 날 이룩한 죄를 회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이념(理念)과 사상(思想)과 편견(偏見)을 모두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경험과 교육을 통하여 많은 지혜와 지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혜와 지식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박사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하느님을 아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알기 전에 가졌던 모든 지적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회개 없이 예수를 믿을 때 겸손함을 지닐 수 없고, 따라서 올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늘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설교를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므로 그 신앙이 올바로 성장하지 않고 연조(年條)만 더하여 교만하여지고,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린 마음이 없기에 새로운 진리에 대한 수용(受容)을 거부하면서 성장을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신자들에게서 겸손을 찾아보기 힘들고 따라서 끊임없는 말씀에 대한 탐구는 없고, 교회 내에서 정치적인 입지만을 확보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어 놓기 일수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겸손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그러나 우리가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경험과 이념을 모두 버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흐려졌던 우리의 영적 지각력이 단번에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경이 마비되는 것은 순식간에 되지만, 마비되었던 신경이 회복되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마비되었던 우리의 영적 지각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골로새서 본문에 보면, 하느님께서 신령한 지혜와 총명(聰明)으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사가 되셔서 우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점점 더 자라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의 지식을 "그노시스"라 하고, 영적 지식을 "에피그노시스"라 하여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피그노시스"를 얻기 위하여 늘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을 기다려, 성경을 공부하고, 설교를 들으며, 하느님의 창조하신 세계와 그가 주관하시는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성경을 읽어서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신령한 지혜"가 여기에 필요한 것입니다. 원론적인 중심 메시지를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신령한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할 까닭이 바로 이 신령한 지혜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그냥 읽을 뿐만 아니라 묵상하고 또 다시 읽기를 반복할 때 그 뜻을 점차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아와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는 바로 성경의 메시지를 찾아 선포함과 동시에 그 발견한 메시지를 어떻게 내 생활에 적용할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명상하면서 거기서 찾아낸 하느님의 뜻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신령한 총명"입니다. 총명(聰明)은 성경에서 찾아낸 원리를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이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이 되는지를 아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진리는 알고 있지만, 그들의 삶이 그 진리를 따라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그 진리를 생활에 적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하느님의 뜻과 어떻게 상관이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신령한 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은 먼저 자기가 창조하신 세계 속에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을 주셔서 자기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이 말은 성경과 세계, 성경과 역사는 같은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와 그 역사를 해석해 주고 밝혀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면, 거기에 반드시 두터운 안내 책자가 있습니다. 그 안내 책자를 보아야 그 기계나 프로그램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느님의 역사에 대한 안내 책자입니다. 그것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계를 창조하셨고, 그것을 어떻게 주관하고 계신지, 또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계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와 세계의 역사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를 실제에 적용시키는 능력 그것이 곧 신령한 총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바로 이 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지금 하느님의 진리를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당 안에서는 분명히 믿는다고 "아멘"하고 손을 들었지만, 실제 생활에 나가서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이리 저리 헤맬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받아 말씀을 따라 이 역사를 잘 분별해 가야 하겠습니다. 잘못된 파악한 하느님의 뜻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에게 계시를 보여 주셔서 자기가 할 일을 가르쳐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계시는 십중팔구는 악령의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셨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또다시 시시콜콜 계시를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지혜란 원리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수학에 있어서는 공식과 같은 것이어서 공식만 잘 알면 어떤 문제이든지 잘 풀 수가 있습니다. 공식을 모르면 문제를 풀 때마다 매번 어려움을 겪게 되고, 한 문제를 누가 풀어 주었다고 해도 다음 문제에서 걸리게 마련입니다. 교사가 만약에 공식을 가르쳐 주지는 않고 문제를 일일이 풀어 주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일일이 여러분의 모든 문제에 계시를 주신다는 것은 낭비요, 잘못된 교육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일이 계시를 받아야 하는 교인은 낙제생 교인입니다. 어떤 일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마귀의 장난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 행하는 곳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오히려 거짓 예언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오히려 외로운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되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도 결국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보다는 많은 거짓 예언자들의 엉터리 예언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수에 따라 좌우되거나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역사의 원리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따르는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그리로 휩쓸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과 깨우치심을 통해 성경 가운데서 발견한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말씀을 굳게 잡을 때 우리가 수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서서 그 시대의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여러분에게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뜻에 순종하심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