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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5일 성탄절 둘째주일> 사랑과 생명 요 나 서 4: 5-11 |
새해 첫 주일 아침 영생의 소망을 주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금년에도 우리 교회 주제를 "생명문화를 가꾸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생명문화를 가꾼다는 것은 생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함을 뜻합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고 그 생명이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고 마음껏 뻗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여는 일이며, 가난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생명문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영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신앙적 풍토를 조성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대립과 갈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고 있습니다. 환경이 파괴되면서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발전시킨 물질문명으로 우리의 영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사람들은 오히려 하느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아직도 어둠에 쌓여 있어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 마음놓고 자랄 수 없으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문화를 가꾸는 일은 이런 세상을 바꾸어 평화와 사랑과 협력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며, 부활과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땅에 두루 전파되어 물질문명이 극복되고 영적 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런 생명문화를 가꾸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거창한 이야기여서 우리 자신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출발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존하고 자랄 수 있다는 분명한 의식, 그리고 하느님을 만날 때 그 생명이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거기에 생명문화가 꽃피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문화를 일구는 일은 바로 나 자신부터 올바른 의식을 가질 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요한일서 말씀에 보면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인데,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습니다. 생명을 살해한 가인처럼 되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인처럼 살인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살인자요,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하는 자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깃들인다는 말입니다. 가인의 문화는 죽음의 문화입니다. 형제일지라도 경쟁자라고 생각되면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결국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가인의 삶입니다. 현대 사회가 경쟁사회가 되면서 흑과 백을 가리게 되고, 아군과 적군을 나누며, 좌와 우로 편갈라 대립하고 경쟁하면서 상대방을 짓밟고 권력을 쟁취하거나 혹은 전쟁을 통해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 넣습니다. 보다 강한 자가 나타날 때 또 다시 죽음에 의해 쫓기는 역사가 반복되게 마련입니다. 결국 이런 문화 속에서는 이기는 자나 지는 자 모두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양극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면서 상대방을 저주하고 부정하는 삶은 결국 둘 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계에 평화는 있을 수 없고 거기서 참다운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요나서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성을 지켜보면서 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절대로 이스라엘의 적인 앗시리아의 심장부 니느웨 성이 그대로 용서되어서는 안되고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그래도 결국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을 기대하며 요나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요나의 생각이 오늘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북이 대립하여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이루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확신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요나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비록 죄악이 가득한 도성(都城)이지만 어찌하든지 저들로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죽이고 없애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죽었던 생명까지도 살리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죽음의 지배 밑에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며 사랑을 통해서 이웃을 만나므로 모두가 한 생명공동체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나뉘어 대립하고 증오하고 죽여야 할 관계가 아니라 모두 함께 살아야할 유기적 생명임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서로 사랑할 때 건강하게 되고 아름다운 생명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자라날 수 있음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라 가는 생명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이 땅의 삶에서 사랑을 행하지 않고 있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깃들이 못하고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3:17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 머물 수 없고,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결국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자리잡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상대방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며 나와 함께 하느님의 생명의 고리에 연결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바로 사랑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샘솟으면 내가 영생에 들어간 것이며,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음이 증명됩니다. 요한에 의하면, 사랑이야말로 예수를 믿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사랑이 회복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다는 증거이며,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랑의 회복은 바로 생명의 회복이며, 내 존재의 회복입니다. 아무리 내가 예수를 믿고 '주여, 주여' 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결국은 생명을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뜻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생명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분단과 갈등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널려 있는 편가르기, 학벌주의, 지역주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노력은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할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첩경임을 기억하고 새해 더욱 힘써 생명문화를 가꾸어 가야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된 생명의 역사가 오늘 이 민족의 역사에 접목되어 아름다운 생명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도록 금년 한 해 기도하며 사랑하며 헌신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