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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7일 부활절 둘째주일> 죽음 후의 열매 이사야서 53:10-12 |
어떤 노인이 정원에서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기보다는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삶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현재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는데 반하여 자기가 죽은 후의 미래를 위해서 살라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내가 미래의 자손을 위해 과실수를 심고, 또 그 자손이 그 후손을 위해 또 다른 나무를 심을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운 열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과실수는 현재 우리의 삶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내가 살아있는 동안 거두는 열매보다 죽은 후에 보다 많은 열매를 맺는 과실수에 비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선조들을 보면, 그들이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다음에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경우 그가 살아있을 동안에 맺은 열매 즉 삶의 업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이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그런 신앙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린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살기보다는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교훈을 통하여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죽은 후에 맺히는 열매 오늘 읽어 드린 요한복음 15장 말씀은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로 여러 차례 이 본문으로 준비된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이 본문을 깊이 통찰하면 언급되지 아니한 새로운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열매를 맺어서 그 열매로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포도나무의 원줄기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과 열매 맺는 삶이 동시적이 아니고 시차를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충실하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허락 받은 삶에서 꾸준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계명을 준수하면서 사랑을 실천할 때 서서히 거기서부터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살아있을 때는 열매가 없고 죽은 후에 그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삶은 짧은 시간이어서 그 시간에 가지(branch) 된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기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도 그가 죽은 다음에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죽은 다음에 라야 진정으로 열매다운 열매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 땅에 머무신 33년의 삶은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공생애는 3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기간에 무엇인가 이루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거둔 열매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물론 많은 병자도 고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실제로 그가 거두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세계는 점차 변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정서에 깊이 영향을 준 삶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처럼 미래의 문화들을 크게 형성한 삶도 없으며, 그처럼 인간 관계의 양상에 혁신적으로 영향을 준 삶도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를 따른 제자들은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즉 로마의 압제 밑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여 독립시키고 예수께서 그 통치자로 군림하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기대와 달리 쫓기고 고난 당하는 길로 나아가셨기에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온전한 의미는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비로소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사도들도 그를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오늘날까지 맺고 있는 열매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는 그의 서신들은 기독교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디 사도 바울뿐이겠습니까? 교회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죽은 후에 열린 열매들은 오늘 기독교 발전의 초석이 되고 있음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끼치는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아버지의 열정적인 신앙과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의 삶은 저의 삶 속에서 계속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삶과 존재가 적어도 내 자식들에게 기억되면서 그들 속에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의 삶의 업적이나 행적이 아닌 존재로 말미암아 죽은 후에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평가되고 열매가 열릴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바른 삶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희생을 밑거름으로 열리는 열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떠나간 후에도 열매가 맺힐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매는 언제나 죽은 후에야 열리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자기 희생적인 삶을 충실하게 이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맺힐 열매를 위해서는 이 땅의 삶을 완전하게 희생하여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땅에서는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욕과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수난의 길을 가신 것은 순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은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희생의 삶은 남을 위한, 즉 만유의 구원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희생의 삶을 통해 맺혀진 열매는 헤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다”고 하였습니다(빌 2:9).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위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삶,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란, 작은 자가 되어 섬기는 삶이며, 주인의 명령을 따라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충실하게 장사하는 삶이며,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항상 기름을 준비한 삶이요, 그가 주신 새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삶,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삶, 온유한 삶,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삶, 청결한 삶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삶이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대접할 줄 아는 삶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삶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주목하고 칭찬하는 업적이나 자리에 올라가는 대신에 작은 자로 낮아져서 섬기며, 희생하며, 사랑하는 삶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인내와 친절, 선함과 신실, 그리고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업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이런 덕목들이 자리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삶을 이런 덕목들로 가다듬을 때 그 삶이 빛나고 그 존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의 삶을 마칠 때 성령께서 아름다운 열매가 오고 오는 세대에 계속 열리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가 설 때 존귀와 영광과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벧전 1:7).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은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왕권을 추구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까’를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솔로몬은 왕권을 확고하게 만들면서 나라를 든든하게 세운 혁혁한 공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자기 생각대로 정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다윗의 후손에서는 메시야가 탄생하였고, 모든 후손들에게 사랑 받는 신앙의 선조가 되었으나, 솔로몬은 그가 죽자마자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모든 후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를 맺지 못한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근세사에서 기억되는 인물들이 누구입니까? 저에게는 김교신, 김재준 목사,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같은 분들이 기억됩니다. 그분들은 저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간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참으로 혼탁하고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도 우리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고 성령께서 이런 분들을 통해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분들과 달리 그 역사 속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재물을 쌓으며, 명예를 추구한 많은 정치가 기업가 학자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남긴 부정적인 자취를 지우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 뜻에 순종하여 섬기는 삶, 사랑하는 삶, 희생하는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뒤를 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이루었나를 살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으며, 그래서 얼마나 섬겼으며,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내가 떠나간 뒤에 나의 자손들이나 후대 사람들 속에 나로 말미암아 어떤 열매가 맺힐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존재는 정말 나만을 위한 존재였는지 아니면 남을 위한 존재, 하느님이 기뻐하실 만한 존재였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예수님처럼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