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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14일 부활절 셋째주일> 죽음보다 강한 것 호 세 아 서 13: 9-14 |
오늘 읽어 드린 호세아서와 고린도전서 말씀에 보면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강한 죽음을 꺾으시고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향하여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죽음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거기서 풀어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복음은 구체화되어 세계 속에 놀라운 희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자주 일어나는 천재지변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옛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삶에서 죽음은 더욱 무서운 기세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되면서 죽음을 터부시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며, 죽음을 가장 큰 저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우리는 전혀 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그 죽음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죽음을 날마다 생각하며 준비를 했다면 다가온 죽음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당당할 수도 있을텐데, 우리는 대체로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기에 죽음은 더욱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을 우리 속에 더욱 확실하게 갖도록 힘써가야 하겠습니다. 죽음의 공포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몇 가지만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죽음에 임박하여 맛보는 고통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고통, 사회적 고통, 영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자신은 이제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각,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작별하고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육체적 고통 못지 않은 정신적 고통을 줍니다. 또한 남은 가족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사회적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고통은 인생의 의의, 죽음의 의미, 사랑과 고통의 의의 등에 관한 근원적 질문에서 나오게 됩니다. 둘째는 홀로 죽음을 맞는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 해도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에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고독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셋째는 존엄 상실의 공포입니다. 일생을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왔다가 죽음 앞에서 추해지는 자신에 대한 공포입니다. 넷째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부담이 될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나이 들어 무기력해지면서 가족에게 폐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입니다. 다섯째로 죽음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늘 불안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이미 그의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불안한 것이며 죽음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게 마련입니다. 여섯째로 인생을 불완전한 채로 끝냈다고 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하지도 못하고 미완성의 생을 남긴 채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쓰라린 인식은 고통에 가득찬 불안이 되어 죽어 가는 사람을 두루 감싸게 됩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교육과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막연하게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에 의지하면서 별로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오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의외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와서 많은 분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만 정말로 믿음을 가진 분의 죽음이라고 기억되는 것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하여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절로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하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무력화시킨 하느님의 사랑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죽음을 무력화시킨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무서운 죽음의 지배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었다면 죽음은 우리를 가두는 쇠창살이 되어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고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 준비 교육을 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죽음을 패하게 하시고 그 쏘는 독침을 무력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죽음을 논하고 그것을 준비하므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자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호세아서 13장 12절과 13절을 좀 풀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풀어서 읽어보면 호세아의 예언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해온 사망의 그 막강한 힘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리겠다는 선포입니다. “예언자 호세아에 의하면, ‘죽음’의 정복에 관한 가장 확실한 약속은, 전적으로, 인간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해산하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 진통의 산고를 참고 자궁문을 열어 <자식>이라는 생명을 생산해 내려고 사력을 다하는 ‘산모와도 같은’ 하느님 그분, 즉, 우리의 어버이요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신 그 하느님, 어머니이신 하느님, 그분으로부터 선포되었다고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에 넘쳐서 말하고 있습니다.”(김이곤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설교에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은 처음부터 죽음의 공포를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진통하시는 분으로 그렇게 창조된 생명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며 아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을 죽음의 공포로 시들게 만들고 절망에 빠지게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원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처음에는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으로 발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 과정에서 육체의 죽음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 태어나는 은총의 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면서 육체의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돌보심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것인데, 타락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사실상 성장이 멈추고 육체의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렇게 생명을 진통하면서 창조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결코 죽음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셨다는 사실은 더 이상 죽음이 인간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도록 그대로 두시지 않겠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우리를 죽음의 지배로부터 건져내려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그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예언자의 주장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실로 그분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그 분은 우리로부터 죽음의 세력을 기필코 제거해 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단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는데 그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마침내는 모든 인류를 지배해 온 죽음을 무력화시키는 데까지 이를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함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근본 바탕은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사랑은 모든 생명의 기초입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사랑 안에서 자라고 사랑으로 온전해지며 사랑으로 완성되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나간 인간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시들며 죽음의 사슬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떠난 생명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시고 마침내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사랑의 예언자인 호세아는 바로 이런 하느님의 큰사랑을 체험하였고 그 사랑 때문에 마침내 죽음의 세력이 완전히 꺾일 것을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사랑이 죽음의 두려움을 몰아낼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런 호세아의 예언은 마침내 하느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였고, 그 죄로 말미암아 막혀있던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외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사랑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의 암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암은 사실상 죽음의 사신과 같아서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사랑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의사의 치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까운 가족들과 교회공동체의 기도와 사랑이 더욱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사실은 바로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통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암을 정복하고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 죽음의 공포는 사실상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은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피하고 생각하지 않으며 터부시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은총의 관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이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죽음을 준비할 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며 하느님의 은총의 부르심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가을 힘 주옵소서”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어진 일생을 열심히 살고 낙엽 지듯이 아름답게 삶을 마감하고 소망하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 하느님께 이르도록 늘 준비된 삶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