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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3 07:40

관용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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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6월 23일 성령강림절 여섯째주일>
   육성설교 / 동영상

관용과 평화

창  세  기  50:15-21
로  마  서  12:14-21

     

    <한겨레>신문 '월드컵 창'에 보니까, 우리와 8강전에서 맞붙은 스페인은 축구 왕국이라고 합니다. 축구클럽은 수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회원들은 축구장에 지정석을 갖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축구경기 중계에 전파와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스페인은 월드컵에서 재미를 못 봤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11차례나 나갔지만 단 한번 4강에 올랐을 뿐입니다. 조별 돌려붙기에서 탈락한 것도 다섯 번이나 됩니다. 스페인이 큰 경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로 '승부욕의 부재'를 꼽는 이가 많다고 합니다. 승부보다는 축구 자체를 즐기는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실제 관중들은 승패에 관계없이 선수들의 묘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선수가 적군이든 아군이든 개의치 않는다고 합니다.

    16강전에서 우리와 붙은 이탈리아는 정반대로 그들에게 축구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축구는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서바이벌게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적군과 아군이 분명하게 갈립니다. 지난 번 경기를 통해서 본대로 그들은 대단히 거칠었고 대단히 적대적이었습니다. 게임에 진 이탈리아는 심판과 한국팀에 안 좋은 감정을 들어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이탈리아의 반응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라간의 친선을 위해 치른 월드컵 축구가 오히려 두 나라간의 감정의 골을 만들어 놓게 되었습니다.

    이번 월드컵 축구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4강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면서 온 나라가 흥분하고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에 몰려든 인파들은 막상 축구경기를 자세히 볼 수 없고 그저 인파에 함께 휩쓸릴 뿐입니다. 그것은 축구 경기 그 자체보다도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 수백만의 인파가 세계적인 선수들의 축구게임을 즐기기보다는 단순한 승부 그 자체에 집착하고 있으며, 약소국으로 설음을 당하던 대한민국의 저력을 과시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나친 민족주의나 애국심의 발로는 월드컵이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 평화와 협력의 정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탈리아를 너무 닮은 것이 아닐까요? 스페인처럼 축구 게임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승부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게임의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증오심을 들어내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부당한 게임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양극화 현상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군과 적군, 흑과 백, 우와 좌, 남자와 여자, 노와 사, 여와 야, 빈과 부 등으로 대립하면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더욱 극대화 해 갑니다. 이를 양극화(兩極化)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사회일수록 분쟁과 다툼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분단 이후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한 차례 전쟁을 치렀고, 그 이후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 사는 우리도 자연 우리의 사고구조 자체가 흑백논리에 익숙해지고 좌우대립에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여 아니면 야 어느 한편에 서야하고,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우리의 이념으로 간직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압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우리 사회는 신문조차 이념적 성향이 구별되어 있어 어느 신문을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지만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상대방을 같은 경쟁자로 인정하고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나가는 대신에 무찔러버릴 적으로 간주하기 일수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더욱 보수적인 신앙으로 다원종교 사회 속에 살면서도 타종교를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 생각하는 대신에 마귀의 자식으로 생각하여 극단적으로 대립하거나 저주해버리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가 생겨 다투고 나뉘게 되면 다시 화해하고 합하는 법이 없습니다. 목자라고 존경하면 따르던 목사도 어느 날 갑자기 마귀로 떨어져 교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교회 분쟁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 자리잡은 양극화 사고 때문에 화해와 관용의 정신이 깃들일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6·25 전쟁 52돌을 마지하면서 남북 간의 메워지지 않는 증오의 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15 선언 2주년이 되었지만 그 빛은 바래고 우리는 여전히 견고하게 반공의 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을 우리의 주적(主敵)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미국 부시 대통령의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한 것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입니다. 북한을 도와주는 것을 무조건 퍼주는 것으로 폄하(貶下)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과연 통일은 어느 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가 대체로 이런 양극화 현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동서냉전의 시대에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계가 대립하였다가 소련이 와해된 이후 미국은 의도적으로 새로운 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였고, 이락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를 향하여 줄을 설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런 정책은 다른 나라 사람들 가슴속에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세계는 관용과 화해 대신에 증오와 분열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분쟁은 끝없는 보복의 연속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유엔은 세계 관용의 해를 선포하면서 이런 대결로 치닫는 세계를 진정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더욱 격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유엔이 관용의 해를 통해 막으려는 것은 특정 민족과 인종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증, 종교적 적대 등이었지만,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될 뿐입니다.

    유네스코는 관용을 '편견과 독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타인에 대한 선입견 없는 긍정적 태도'라고 풀이하였습니다. 또 개인적 차이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남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지만, 재능이나 신념 또는 신앙 등은 다를 수 있다. 이러한 개인적 차이야말로 개인과 고유의 문명을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규정하면서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행동 규범을 피하는 것이 관용"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는 절실하게 관용이 필요한 세계입니다. 아니 우리 민족이야말로 관용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에 보면, 관용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14절에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교회를 핍박할 때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라는 권면입니다. 핍박하는 사람이 다른 종교인일 수 있고, 혹은 공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대신 축복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타종교에 대해서나 사회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폐쇄적이라면, 축복하는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가 타종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는다고 하여 그 종교의 신앙이나 교리를 수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요, 순례자로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정신입니다.

    15절에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관용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묘하게도 6월의 한반도에서 큰 두 개의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아리랑 축전이 열리고 있고, 남쪽에서는 월드컵축구경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팀이 4강 진출이라는 좋은 성적을 내면서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축제를 축하해주고 참관하고 박수를 쳐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팀의 놀라운 발전에 세계가 함께 놀라고 축하하는 마당에 북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북쪽이 이런 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한 마디만 하였어도 우리는 북쪽에 대한 미움을 그만큼 덜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리랑 축전이 비록 김일성 주석의 90회 생일과 김정일 위원장의 60회 생일, 그리고 건군 70주년을 기념하는 축전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아량을 갖고 많이 참여해 주었다면 북쪽도 그 생각을 달리 하지 않았을까요?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해 줌이 곧 관용이라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 관용의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폭넓은 신앙을 갖는다면 나와 다른 생각이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으며,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마음'이란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짓는 마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 '비천한 사람'과 사귈 수 없고, 자기보다 월등한 사람에 대해서는 비굴한 마음을 갖게 되므로 그들과도 사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는 고립될 것이고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 것입니다.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결국은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18절에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여러분 쪽에서"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먼저 관용의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이 관용의 정신을 갖고 나를 받아 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가지고 상대방을 용납하고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아니라,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도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와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는 잠언서 말씀 인용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용의 정신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북쪽이 굶주릴 때에 도와주는 것을 퍼주기라고 하지만, 성경은 마땅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리고 목마른 북쪽 동포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북한사회는 사실상 모든 삶의 기반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나마 저들이 자존심을 가지고 버티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저들이 완전히 자존심을 버리고 거지처럼 도와 달라고 달라붙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도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함께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역사를 보는 거시적 시각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고 그의 관용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다가 이집트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렸던 일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자기 가족들을 다 불러왔고,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자 보복을 두려워한 형들이 그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빌 때, 요셉은 너그럽게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했던 일들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그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역사로 받아드렸습니다. 요셉은 보다 크고 넓은 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문제를 보았기 때문에 형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남북관계에서도 우리가 과거를 결코 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에만 매여 있으면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망령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 결코 우리는 앞으로 발전해 갈 수 없습니다. 6·25 전쟁의 아픔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언제까지나 거기에 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열어 가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역사와 그 섭리를 믿을 때 관용을 베풀 수 있고, 그리고 마침내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북관계를 이념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결코 통일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다 거시적인 시각 즉 세계를 하나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접근할 때 통일도 이루어지고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양극화 현상의 극복도 마찬가지로 보다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할 때 흑과 백의 대립이 아닌 상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찾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태극기를 보면 붉은 색과 파란 색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적과 청이 직선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적과 청의 색깔이 분명히 다르지만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포용(包容)하면서 완전한 일치인 원을 이루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룬 화해의 역사는 바로 모든 대립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가 서로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치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흑과 백, 좌와 우, 남과 북이 서로 대립하며 양극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에는 그 어느 쪽에도 진리가 없습니다. 흑 없이 백이 있을 수 없으며, 좌 없이 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룰 때 거기에 진리가 깃들이게 됩니다. 태극처럼 적과 청이 서로를 껴안으면서 하나가 될 때 진리가 됩니다. 이것이 관용이며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게 됩니다.

    다시 6·25 전쟁 52돌을 맞이하면서 우리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쫓아내고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뜻을 받아 들여 남과 북 사이의 관용과 화해의 물꼬를 터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문제가 풀리면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자연스럽게 풀려 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들을 한 번 돌아보고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증오와 편견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와 그 사랑을 받아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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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2년 3월 17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 점점 완성되어 가는 삶 시 편 103: 1- 5 로 마 서 8:26-30 지난주일 설교에 죽음도 은총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음은 결코 저주나 형벌의 ...
    Date2002.03.17 Views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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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탄생처럼 죽음도 은총이다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2년 3월 10일 사순절 넷째주일> 육성설교 탄생처럼 죽음도 은총이다 전 도 서 3:10-15 요한복음 12:24-26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Date2002.03.09 Views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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