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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9 17:42

두 아들의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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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5월 12일 부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21:57)

두 아들의 효
 

잠       언      23:15-25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 사랑의 비유'는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자 기쁨으로 영접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비유입니다. 이런 비유의 본래적 의미말고도 이 비유 속에는 여러 가지 교훈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서 설교자들이 즐겨 이 비유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므로 이 비유에 나타난 두 아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어버이 공경(恭敬)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맏아들의 경우

    우리는 먼저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나갔을 때 끝까지 집을 지키면서 아버지를 모신 큰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큰아들은 확실히 작은 아들보다 성실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한 아들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큰아들조차 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는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비유의 큰아들은 훌륭한 아들이며 효성스러운 아들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삶을 작은 아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큰아들이 훌륭한 사람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위로가 되었고, 아버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농장에 남아 수년간 꾸준한 봉사로 아버지를 도와 일했습니다. 그는 양심적이었고, 신뢰할만한 자였으며, 근검 절약(勤儉節約)하는 모범적인 일군이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충실하였고, 관대하지는 않았지만 공정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는 도덕적인 순결함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탕자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과 같은 부끄러운 기억들과 쓰라린 후회의 일들로 시달리지 않았다는 것은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맏아들은 꾸준하고 부지런하였습니다. 탕자가 돌아와 잔치가 벌어진 그 날도 큰아들은 들에서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만큼 그는 열심히 아버지 집에서 일을 했던 것입니다.

    맏아들의 이런 장점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점들입니다. 우리는 좀더 철저하게 윤리적으로 흠없는 삶을 위해 노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경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저들에게서 배워야할 점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단(異端)으로 지목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라 할지라도 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熱情)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가진 신앙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열의(熱意)가 없이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맏아들의 열심과 그 성실성(誠實性)을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특히 부모를 모시고 공경함에 있어 맏아들은 모범이 될만한 인물입니다. 오늘날 가정들이 이 아들처럼만 한다면 나이든 많은 부모들이 외롭지 않게 그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큰아들의 이런 장점에 대해서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또 아버지에 대하여 항의한 그 태도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아들의 충성스러운 봉사에 고마움을 표하고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이 모두 다 그 아들의 것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한 점을 슬퍼했던 것입니다.

    큰아들이 여러 면에서 좋은 아들이지만, 다만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염려하며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는데 그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프고 지친 몸으로 부끄러워 얼굴도 못 든 채 슬그머니 돌아온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그 애절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아들의 냉혹(冷酷)함이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전에도 큰아들에게서 그런 냉정함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작은 아들이 돌아온 그 날, 아버지는 큰아들 속에 숨겨져 있었던 그의 냉혹한 성품을 새삼 발견하고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큰아들이 외형상 부모를 잘 모신 효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진정으로 그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린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이 비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분명히 자기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은 단순한 의무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은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됩니다만,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사랑이 아닌 의무로만 끝날 때 그 의무 수행은 오히려 부모에게 부담이 될 것입니다.

    가족은 의무로만 엮어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그 가정은 곧 메마른 사막처럼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집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의무 때문에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한 헌신은 의무가 아닌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일도 의무가 아닌 사랑이 그 근본이 될 때 진정한 효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쩔 수 없어 부모를 모실 때 거기에서 진정한 공경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아들이 자기의 옳음을 주장할 때 아버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전적으로 옳구나. 너는 정말 모범적인 아들이란다. 너의 행실은 언제나 옳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단다. 나는 너의 행동으로 우리 집안이 불명예스러웠던 때를 한번도 기억할 수 없구나. 그러나 얘야, 나는 너에게서 따뜻하고 충동적이며, 자발적인 사랑의 행동이나 자신을 잊은 채 베푸는 친절한 행위를 한번도 본적이 없구나."

    그렇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였던 사랑의 마음을 그는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의무적으로 맺어진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월급을 받고 고용된 관계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이해 관계를 초월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사랑이 아닌 법적인 관계, 이해 관계로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완벽하게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한 것은 그런 딱딱한 법적인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부자관계(父子關係)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맏아들은 이런 점에서 벌써 아들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게는 염소새끼 하나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아버지에게 행한 충실한 의무 이행에 대해 어떤 대가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주고받는 무슨 계약관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유치하고 편협한 생각입니까? 이에 대하여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이 얼마나 너그럽고 사랑이 넘친 말입니까? 염소새끼 한 마리를 따지는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폭넓은 사랑은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가정들이 물질 때문에 싸우고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 공경도 순전히 그가 가진 재산 때문에 이루어질 경우가 허다하며, 재산이 없는 부모의 경우 자식들에게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기 일 수입니다. 결국 오늘의 가정들이 깨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경제 성장 위주로 발전하면서 경제제일주의를 지향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무리 부모를 공경하라고 설교하여도 그것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공경을 받으려면 끝까지 자기 재산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야박한 이야기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로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핏줄로 맺어진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이와 같이 돈으로 계산하려는 오늘의 각박한 삶이 우리 사회 전체를 메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회를 향하여 사랑을 회복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부모 공경이 약화된 것은 바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모 공경과 가정의 화목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물질 문명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경우

    다음으로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작은 아들은 우리가 흔히 그를 '탕자'(蕩子)라고 부르는 대로 효와는 거리가 먼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먼 도시로 나가버린 불효 자식입니다. 아버지를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욕망을 불태우기 위해 미련 없이 아버지 집을 떠났던 아들입니다. 그가 집을 나간 후에 아버지는 하루도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떠나간 자기를 근심하며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아버지를 자기의 삶의 관심 밖으로 몰아낸 불효 막심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형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형이 아우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우애(友愛)가 좋은 형제가 되기에는 너무나 서로 다른 성격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작은 아들은 성격이 외향적(外向的)이어서 착실하게 집에 머물면서 농사를 짓는 것은 그의 성격에 적합치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약간은 호탕(豪宕)한 기질이어서 무엇인가 큰 일을 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실수가 많았고 성실성이 부족하여 신뢰를 받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맏아들은 절제된 인간의 전형(典刑)이었으며, 매사에 신중하고 근면하였습니다. 맏아들은 그의 성격상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우는 형의 이런 빈틈없는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매사에 착실치 못한 아우에게 형은 항상 핀잔을 주었을 것이고 아우는 그런 형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결국 이래저래 집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해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먼 도시로 떠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근본적인 죄입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현대인의 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맺어진 관계를 모두 깨트리고 오로지 자기 욕망의 성취를 삶의 제일 큰 목적으로 삼은 현대인들이야말로 탕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가정 파괴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해 버리는 인간의 오만함에 있습니다.

    가정은 창조 질서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이 가정이 깨어질 때 창조의 질서도 함께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엮어주신 가족 관계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물론 이런 혈연적인 가족관계가 하나님 나라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진정한 내 형제요, 자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도 그렇고, 부활한 세계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더라도 이 땅의 가족 관계가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의 창조질서에 있어 가족 관계를 올바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 19:6)고 말씀하심으로 가족 관계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함부로 깨트려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부부의 이혼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든지,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든지, 형제자매가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남남으로 돌아선다든지 하는 모든 문제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현대 사회가 물질 문명에 바탕하면서 도시화되고 그 도시 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범죄로 인하여 부부의 이혼이 증가하고, 미혼모가 속출하며, 그래서 아이들이 버려지고, 그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을 가는 등 비정상적인 관계들이 늘어나므로 우리 사회는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하여 핵가족화 되므로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면서 부모 공경도 아울러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서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며, 그 가정의 파괴는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사회의 혼란은 더 많은 범죄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에서 탕자가 자기의 모든 재물을 탕진하고 완전히 가난한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가 아버지를 생각하였고, 그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돌아왔습니다. 그 때 그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였고, 그를 다시 아들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탕자의 귀가는 그 아버지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무시하였던 탕자가 이제는 아버지의 존재를 귀히 여기고 그에게 돌아간 일이 뒤늦게 탕자가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최대의 공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이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면 거기에는 돈이 없어도 참으로 아름다운 부모 공경과 자녀 사랑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결코 돈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질서를 이해하고 그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부모 공경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창조 질서로서의 가족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관계를 바르게 세우며, 속히 회복할 때 아름다운 가정이 성립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인식하면서 우리 가정을 올바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편만한 물질 만능주의를 벗어나 사랑으로 엮어지는 창조질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우리 속에 믿음으로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여 모셨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함을 받은 우리는 탕자처럼 이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라 우리의 가정을 사랑으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 땅의 물질 문명을 따른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주의 자녀 됨을 바탕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므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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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10pt; line-height:150%} <2001년 5월 27일 부활절 일곱째주일> 찬양 / 육성설교(26:46)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잠 언 2: 1-12 히브리서 5:11-14 히브리서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Date2002.07.09 Views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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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두 아들의 효

    <2001년 5월 12일 부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21:57) 두 아들의 효 잠 언 23:15-25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 사랑의 비유'는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자 기쁨으로 영접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모든 죄인을 용서...
    Date2002.07.09 Views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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