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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22일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주일> 진실을 말하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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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 15: 1-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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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3-37 |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안델센의 유명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옛날 어느 임금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옷을 지어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훌륭한 재단사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끝에 임금님에게 가장 훌륭한 옷감으로 가장 훌륭한 옷을 지어 바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옷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단사가 지어서 가져왔다는 옷이 임금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어서 옷이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옷을 입었습니다. 신하들도 그 옷이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쟁이로 몰릴테니 모두들 아주 훌륭한 옷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옷을 백성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임금님이 새옷을 입고 궁 밖으로 행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 눈에도 임금님의 새옷이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 옷이 기가 막힌 옷이라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임금님의 행차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임금님이 빨가벗었다." 최근에 발간된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 보면 이 동화를 좀더 확대한 이야기가 있어 잠시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신하들은 분명 임금님 옷의 아름다움을 서로 자기가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나라 안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학자들을 불러다가 그 옷에 대해 연구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권력에 약한 학자들은 옷에 관한 참고문헌이란 문헌은 다 뒤적여 그 옷의 천이 분명 페르시아의 비단임에 틀림이 없다고 연구보고서를 제출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그 이론을 연장시켜 페르시아 비단의 기원과 역사, 그 제조 과정 등을 연구하고, 다른 학자는 다시 페르시아 비단과 중국 비단의 차이, 페르시아 비단의 미래 등을 연구할 것이다. 이런 연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될 것이며, 그 연구 성과를 책으로 펴내 백성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드디어 임금님의 옷에 얽힌 이 모든 이론, 이 모든 역사를 다 아는 것이 훌륭한 신하나 백성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서로 다투어 이를 학습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허영에 들뜬 임금을 골탕 먹이려는 지혜로운 재단사의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무지한 신하들과 백성들에 의해 더욱 확대 재생산되어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다행히 동화는 이 어린아이의 말에 사람들이 정신이 들었고, 임금님도 정신 번쩍 들어 서둘러 궁으로 돌아간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동화의 끝부분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에서는 한 '용기 있고 당찬' 어린이가 "벌거벗었네!"라고 말하는 것으로 상황이 반전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솔직히 말해 이 동화 자체에서도 그 어린이의 말 한마디에 그런 반전이 일어났을 리 만무하다. 우리 나라였다면 아마 안기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하게 고문당하고 비극적 인생을 꾸려나갔을 것이다. 안델센은 그 당시 정치적 부패를 보면서 이런 신랄한 동화를 썼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을 잃어버린 세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진실을 외면해 가는 정치를 신랄하게 꼬집은 명작 동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이런 시를 지은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 시편은 바로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깨끗한 삶, 정의로운 삶, 진실을 말하는 삶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그 시대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깨끗하고 정의로우며 진실을 말하는 자들이었다면,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 조건으로 이런 것들을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룩한 산밑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편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진실치 못한 삶에 대하여 이사야 예언자도 신랄하게 저주를 예언하였습니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사 5:20 예부터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당히 거짓말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습성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계속되어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권력을 가진 상대방에게는 그가 좋아할 말을 하고,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것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거침없이 거짓을 내뱉곤 합니다. 세상을 떠난 성철 스님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우리는 별 싱거운 소리 다한다 라고 생각을 하고 별로 그 의미를 새겨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다 알면서도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성철 스님은 오랜 세월 정진하면서 사회적 현상이나 불교계 안에서 일어나는 비리들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 지금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산상설교에서 이를 경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마 5:37 있는 진실 그대로를 말해야지 진실과는 상관없이 주변의 상황이나 눈치를 살펴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사람들은 왜 진실을 진실 그대로를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진실이 다 좋은 것, 들어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좋은 것이고, 자랑하고 싶은 것, 아름다운 것, 누구나 흠모할 만한 것이라면 구태여 진실을 바꾸어 거짓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밀들이 대체로 좋은 것이 아니고 문제되는 것, 남이 알 때 비난받을 일, 아니면 자기의 약점 같은 것입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진실을 들어내려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거나 거짓으로 꾸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가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임금님의 머리를 깎는 이발사가 보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밖에 나가서 할 경우 죽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그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비밀을 혼자 간직하다 못한 이발사는 나무 밑 땅을 파고 거기에다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그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임금님은 굳이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들어내었고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도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게 하는 점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귀와 달리 당나귀 귀처럼 생긴 임금님,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하여 감추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비밀은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문제삼고 그 때문에 임금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임금의 정치적 능력이나 그의 온화한 품성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그 한 가지 사실로 임금을 평가하려는 그 시대의 여론을 비판한 동화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안 좋다고 생각하여 감추려는 진실들은 상당 부분 들어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는 것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들어내어 비판받을 것은 받고 사죄할 것은 사죄하면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되게 적어 출판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과거의 부끄러운 침략의 역사를 그대로 들어내어 세계의 심판을 받으면 오히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텐데 억지로 그것을 미화하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실은 덮는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대로 드러나고 맙니다. 기독교는 그런 점에서 좀 나은 편이라 하겠습니다. 과거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사실에 대해서 해방 후 교회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잘못된 일이었다고 공포하고 공식적으로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해 일제 하에서 천황을 찬양하고 젊은이들을 총알받이 나가라고 선동하였던 언론들이 해방 후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혀 그런 사실을 사과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독재정권에 빌붙어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골라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반민주적 행위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언론들에 대해 역사가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에서 보듯이 권력에 아첨하거나 혹은 권력의 압력 때문에 진실을 진실로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참 인기 있는 사극인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때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궁예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었고,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모두가 잘못된 것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석총 같은 고승(高僧)만이 진실을 말하다가 철퇴에 맞아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궁예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죽고 맙니다. 사극 "여인천하"에서도 과거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들 가운데는 엉터리들이 많아서 그들을 모두 밝혀 공신록에서 빼야 한다는 조광조의 직언에 위협을 느낀 공신파와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한 중종에 의해 결국 그는 죽고 맙니다.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진실은 호도(糊塗)되고, 날조된 죄목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 이후 궁중에서 진실은 사라지고 온갖 음모와 중상모략만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진실을 가리고 아름다운 수식어로 꾸며진 허황한 꿈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면서 온갖 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권력의 횡포로 진실이 왜곡(歪曲)되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정치가가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하여도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라디오 시대에서 TV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림으로 확실히 보여주는 사실에 대하여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도 결국은 대부분 꾸며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TV에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으로 비추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한참 가물 때 국회의원들이 논에 나가 모심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TV 화면에 그 모습이 그대로 비쳤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갔다 온 국회의원의 말이 그것은 순전히 사진 찍기 위한 쇼에 불과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권력은 우리에게서 모든 진실을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특히 우리가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절대 진리로 알고 믿었던 교리가 흔들리고 이제까지 확신하였던 교회의 관습이 단순한 인간적인 결정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므로 우리의 신앙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에 접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감 속에서 더욱 고집스럽게 옛것을 붙잡으려 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가차없이 이단으로 몰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이제까지 붙잡았던 진리는 어렸을 적에 가졌던 생각이고 이제 장성하면 새롭게 그 진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보다 진실에 접근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릴 적 생각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하므로 그 마음이 더욱 닫혀버려 진실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 열린 눈,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지배하였던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이념을 버리고 이제는 맑은 정신, 깨끗한 마음으로 즉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둠은 어둠이고 빛은 빛이라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는 '예'라 하고,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압력,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결국 이런 용기는 성령께서 우리를 일깨우실 때 솟아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를 지른 것은 정치인도, 지식인도, 예술인도 아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끊어버리게 하실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유로워진 어린아이로 돌아갈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마음으로 진실을 보면서 이 땅이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