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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9 10:57

심판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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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구원

 

  <2001년 9월 9일 감사절 둘째주일>
  
찬양   / 육성설교(29:39)

심판과 구원
 

시      편     85: 1-13  

로  마 서      3:21-26  

     

    오늘 읽어 드린 시편 85편을 새벽기도회에서 읽다가 문득 새롭게 느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지은 죄악을 용서해 주시며, 그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셀라) 주의 노여움을 말끔히 거두어 주시며, 주의 맹렬한 진노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의 은총을 노래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악을 용서해 주셨고, 그 모든 죄를 덮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노여움과 맹렬한 진노를 말끔히 거두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께 범죄하여 주의 진노로 심판을 받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고 곧 거두셨다는 말입니다.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져 거기에 따른 벌이 있었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곧 다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의 잘못에 대하여 진노하여 채찍을 들지만 그것으로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끊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을 영원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신다는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7절까지는 현재 당하는 고난 속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특히 5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로 노여움을 품고 계시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는 주께서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영원히 노하시지 않으며, 대대로 노여움을 품고 계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평화를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자손이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진노는 곧 거두어지고 그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하였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 말씀에서도 인간의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시는 하느님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 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받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시는 하느님은 바로 구원의 하느님이시며, 은총이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이 하느님의 너그러움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심판과 구원의 관계를 살펴보고 하느님의 완전하신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죄를 전혀 용납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공의는 결코 인간의 죄악을 적당히 그대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는 적당히 무마(撫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은 틀림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거기에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면 하느님이 당장 어떤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이 옛날부터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 그가 당한 고난은 욥의 죄악에 대한 징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에 당장 벌을 내리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사실상 욥의 고난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었습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기도 하지만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인과응보는 옳은 사상이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아담의 범죄로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아담은 땀 흘려 일을 해야 하는 벌을 받았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 처하여 있는 인간의 상황은 이미 그 죄의 대한 심판의 결과로 주어진 저주받은 삶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이미 시행되었습니다. 인간은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상태며, 지금 죽음의 지배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를 더 짓느냐 아니면 선하게 사느냐는 우리에게는 중요하지만, 하느님에게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산다 할지라도 우리의 근원적인 죄는 상쇄(相殺)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 죄값을 지금 받으면서 살고 있고,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 벌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죄에 대한 심판은 선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만물의 타락이 선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은 죄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심판도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일괄적(一括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범죄 했느냐 안 했느냐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범죄의 근원인 원죄(原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행위로 나타난 범죄에 대한 심판이라기보다 바로 원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은 하느님과 단절되어 죽음의 공포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타락한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멸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타락하였지만 그가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버리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피조물의 죄값을  대신 다 치르고 구원하시고자 택한 방법이 바로 성자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희생이었습니다. 성자를 택하신 이유는 그가 바로 만물을 대표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만물을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말씀이 바로 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실 수 있을 만큼 큰 것임을 뜻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는 확실한 희생 제물로 성자를 택하셨고,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이시기에 그의 구원은 완벽한 것으로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성자의 희생을 통해서 만유를 구원하시어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하시고 통일된 하나의 생명 공동체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몰트만이란 신학자는 이 하느님의 구원의 완전성을 지옥의 파괴에까지 이르렀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있는 한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이 종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과 경험은 현존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그 날에는 그 모든 것은 폐기되고 없어질 것입니다. 지옥이 있고 지옥에서 고통 당하는 자들이 있는 한 하느님은 아직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지옥도 없애고 지옥을 경험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몰트만은 지옥을 인정하지만, 그 지옥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바로 지옥의 문까지 깨트렸기에 믿지 않은 죄인들은 지옥에 들어가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구원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을 열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곳에도 희망은 존재하게 되었다."

    몰트만이 지옥에 들어간 사람도 마침내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바로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이 그만큼 크고 완전한 것임을 믿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힘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살아있을 때 믿은 사람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 죽은 사람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기준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버려진 자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통해 살아 있는 지금과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만, 하느님에게는 그 두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시간을 떠난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인 지옥에까지 미쳐서 그 지옥문을 깨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믿지 않고 실컷 죄를 지으며 향락하다가 이 다음에 죽어서 예수를 믿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지만, 일단은 지옥에 들어가서 그 지옥의 뜨거운 맛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을 때도 감옥에 들어가 몇 년 징역살이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지옥에 들어가 벌을 받는 것은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예수를 믿고 바로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 현명하고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과거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날은 모든 죄악이 드러나는 날인 동시에 그 모든 죄악에 대한 형벌이 시행되는 날이고,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심판하시는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무서운 날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최후의 심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단번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죄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죄값은 모두 지불되었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던 원죄의 값이 다 지불되면서 우리는 그 원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더 이상의 심판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 아닙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은 기쁜 날입니다. 그 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고 "가장 놀랍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총체적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구현화(具顯化) 되는 심판입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의도했던 바가 완성되는 날이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최후의 심판은 정죄하는 심판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구원함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만유가 완전하게 구원함을 받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생명 공동체인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날이 바로 최후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은 무서운 날이 아니라 은총의 날이며,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기쁜 날입니다.

    한국교회 보수 신앙은 이런 하느님의 폭넓은 구원을 너무 제한하였고 그래서 배타적이고 편협한 종교집단으로 낙인(烙印)되어 사람들이 점차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지극히 옹졸하고 편협한 하느님으로 만들어서 그의 큰 구원의 섭리를 오해하게 만든 죄를 범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너무 제한하여 만민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닌 극히 제한된 사람만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너무 평가절하(平價切下) 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민 이스라엘처럼 경직된 틀 안에 갇혀서 폭넓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성전 안에 가두고 거기서만 그를 섬기려 하였을 때 하느님은 그 성전을 허물어 버리시고 다시는 건축할 수 없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포로가 되게 하시어 보다 큰 세계를 바라보며 그 세계를 통치하시고 더 나아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깨닫도록 이끄셨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서도 그 좁은 교회당을 벗어나 우주적인 역사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의 폭넓은 구원의 섭리를 통찰하면서 그 놀라운 은총을 찬양하고 널리 선포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은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이 계획하신 대로 모든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입니까? 그 불완전한 믿음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은 완전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길을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런 하느님의 역사를 믿고 기다리며, 그 은총을 찬양하고 전할 책임만이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롬 11:36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놓고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절대 주권이 그의 구원을 완성하시며 온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겸손하게 마음 문을 열고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놀라운 은총에 찬양을 드리고 감사함으로 그 구원을 함께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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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생명으로 엮으시는 성령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10pt; line-height:150%} <2001년 6월 3일 성령강림주일> 찬양 / 육성설교(20:46) 한 생명으로 엮으시는 성령 에스겔서 37: 1-10 고린도전 12: 4-1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환경주...
    Date2002.07.09 Views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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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10pt; line-height:150%} <2001년 5월 27일 부활절 일곱째주일> 찬양 / 육성설교(26:46)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잠 언 2: 1-12 히브리서 5:11-14 히브리서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Date2002.07.09 Views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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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두 아들의 효

    <2001년 5월 12일 부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21:57) 두 아들의 효 잠 언 23:15-25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 사랑의 비유'는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자 기쁨으로 영접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모든 죄인을 용서...
    Date2002.07.09 Views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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