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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6)

 

  <2001년 9월 16일 감사절 셋째주일>
  
찬양   / 육성설교(24:23)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이사야서     19:23-25  

에베소서      2:14-22  

     

    지난 화요일 미국 심장부에서 일어난 테러 참사사건은 미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그 진동은 세계를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에 놀라고, 이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감정적인 대응이 세계를 불안케 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 첫 번째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장담하는 부시 대통령을 보면서 우리는 왠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세계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 미국이 어처구니없이 당한 테러로 그 자존심이 상하였고, 그것을 회복하려고 미국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보복을 감행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21세기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 슬픕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에베소서의 말씀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명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는 모두 평화를 갈구(渴求)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그가 제시하신 평화의 길을 외면해 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가 추구하신 평화의 길과는 정반대로 세계는 점점 더 힘에 의한 평화를 좇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졌고, 그 정신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이 기독교 정신을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세 마디 단어로 이루어진 이 짤막한 명제는 오늘의 삶에 중요한 지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 고백에 따른 삶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원수(怨讐) 관계에 있는 '우리'

    먼저 여기서 '우리'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양쪽으로 갈려 있다고 하였고, 그 사이에 가르는 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담은 바로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원수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될 수 없는 기름과 물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 때문에 생겼습니다.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다른 민족, 다른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몰아 멸시한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런 선민의식을 버리지 않으므로 세계에서 따돌림당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고, 유대인의 이런 배타적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방인이라고 하는 다른 민족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싫어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원수처럼 서로를 미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배타성이 그대로 오늘날의 역사 속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도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떠나있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면서 분쟁이 격화되었고, 오늘날까지 끊임없는 테러와 보복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일어난 테러도 결국 이런 갈등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한국외대 장병옥 교수의 시론에 보면 그 원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중심지인 워싱턴과 경제 중심지인 뉴욕이 테러를 당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걸프전을 시발점으로 미군의 무기한 중동주둔은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급진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공격의 표적이 되며 긴장을 계속 유발시켜 왔다. 미국은 중동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해주고 있다.

        첫째, 미국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양민을 살상할 수 있는 주요 무기 공급국이라는 점이다. 둘째, 미국내의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아랍인에 대한 오랜 인권침해와 군사적 양민학살을 묵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친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아랍 침공을 ‘정당한 전쟁’이라고 옹호하며 이슬람 세력에 맞설 전략을 연구하고 있다. 셋째,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의 수도를 동 예루살렘으로 하는 데 미국이 반대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수도를 텔아비브에서 동 예루살렘으로 천도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한 요인이 된다.

    결국 미국이 중동의 분쟁을 조정하고 평화를 이끌어 내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을 편들므로 분쟁을 격화시켰고, 그 결과로 전대미문의 끔찍한 테러를 당하였습니다.

    이번에 저질러진 테러로 수 천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그렇게 든든하게 지어진 빌딩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문명의 허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인명이 희생을 당하였으면 그 큰 희생을 바탕으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정책들이 나와야 할텐데, 그 반대로 보복을 다짐하는 전쟁을 공포하면서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런 결정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금 필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반미감정을 가진 세력들과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국제사면위원회는 미국이 보복공격을 추구하기보다는 재판을 통해 범인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노엄 촘스키(72)가“지금까지의 참혹한 잔학행위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보복 공격을 가할 경우 거기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고통을 당할까요? 그런다고 테러가 영영 이 땅에서 사라질까요? 그보다는 막강한 미국을 상대할 수 없는 약자들이 이를 갈면서 더 치밀하고 돈이 적게 드는 테러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그러는 한에 있어 미국은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는 테러 공격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은 "아랍·이스라엘의 건설적인 세력균형의 조정자뿐만 아니라 온건한 이미지의 중립적인 제3자로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혼합하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여 세력불균형을 바로잡아 나가는" 나라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정반대로 조정자가 아닌 분쟁 당사자가 되어 그 막강한 힘을 세계 앞에 과시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화해

    그리스도가 이런 분쟁하는 양자 사이를 어떻게 중재하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영광과 능력을 모두 비우고 이 땅에 연약한 육신을 입어 오신 분이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화해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그 능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세상을 구원하려 오실 때 강한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연약한 자로 오신 것은 힘에 의지하여 구원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연약한 자로 오셨고, 이 땅의 막강한 권력에 의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무기력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룰 어떤 강력한 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를 따른 열 두 제자들은 그가 십자가를 지실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정말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고,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셨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거기에 화해와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인간을 타락시킨 악의 존재인 마귀를 대적할 때 폭력을 통해서 그를 제압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므로 오히려 그를 제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처럼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는데, 그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셨고, 그래서 만물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결국 이 땅에 평화를 오게 할 것이고,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이룩하면서 진정한 평화가 이루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여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폭력을 거부하고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제8차 총회에서 2001년부터 2010까지를 "폭력극복 10년"으로 정하고 '폭력 극복 프로그램'(Programme to Overcome Vio- lence)을 만들어 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의 온전한 의미를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이루고, 적극적인 비폭력으로 갈등을 해결하면서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모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개인적 관계에서 비폭력을 실천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전쟁을 단연코 금지하고, 국제적인 합법적인 중재규칙을 제정하기 위하여 정부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에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WCC의 "폭력극복 10년"은 육체적 폭력 뿐 아니라 감정적, 지적, 구조적 폭력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극복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국가들간의 폭력, 한 국가 안에서의 폭력, 지역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가정과 가족 안에서의 폭력, 교회 안에서의 폭력, 성폭력, 사회-경제적 폭력,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봉쇄의 결과로서 야기된 폭력, 청소년들간의 폭력, 종교적 문화적 관례에서 생기는 폭력, 법적 구조 안의 폭력, 창조를 거스르는 폭력,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소수민족혐오증에서 나온 폭력 등 13가지 형태의 폭력을 주요 이슈로 삼고 있습니다.

    미국이 진정으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라면, 테러라는 폭력에 대응하여 보다 큰 폭력인 전쟁이란 수단을 통하여 테러를 응징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켜온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반미 감정을 가진 세계와 화해를 모색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보복적 전쟁은 반미 감정을 더욱 부추길 뿐만 아니라 반기독교 감정으로 발전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테러에 의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애도한다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는 비이성적, 비신앙적 대응에 덩달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사랑으로 원수를 포용하는 길을 모색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가족

    사도 바울이 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한 것은 그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았던 담인 율법을 허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감하게 뛰어나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18-19

    그리스도의 평화는 원수된 양쪽을 화해하게 하여 다같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쪽을 심판하여 쫓아내고 어느 한쪽만을 구원하여 이루는 평화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함께 구원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문제된 양쪽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은 버리고 어느 한쪽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구약 이사야서에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원수의 나라들인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다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하실 것이다. 사19:25

    이스라엘 민족은 당연히 선민을 괴롭힌 이집트나 앗시리아는 하나님께서 벌을 받아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예언자는 의외로 그 나라들이 이스라엘과 똑같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극악무도한 테러를 저지른 범인들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들을 길러낸 집단이나 나라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큰 벌을 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지목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민중들은 참으로 비참하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불어넣지 말고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모색했어야 할 강대국들이 그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자극하였기에 그들은 자기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테러에 뛰어 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많은 강대국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편들면서 은근히 아랍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들도 그들이 주로 이슬람교를 따르는 민족이라 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는 대립하고 있는 양쪽을 모두 부르셔서 화해하게 하시고 다같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잘잘못을 따지면 테러를 감행한 쪽이나 이를 응징하겠다는 미국이나 다같이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함께 부르셔서 그 죄를 깨닫게 하고 다같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폭력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철저하게 폭력을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를 구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큰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자리 잡은 모든 종류의 폭력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득 우리 안에 담아서 그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을 일구어 가는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 드림으로 그가 주시는 사랑과 평화를 여러분의 가정과 이 사회와 민족 속에 그리고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거듭하는 세계 속에 실현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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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02.07.09 Views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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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10pt; line-height:150%} <2001년 5월 27일 부활절 일곱째주일> 찬양 / 육성설교(26:46) 세련된 지각을 지닌 성도 잠 언 2: 1-12 히브리서 5:11-14 히브리서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Date2002.07.09 Views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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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두 아들의 효

    <2001년 5월 12일 부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21:57) 두 아들의 효 잠 언 23:15-25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 사랑의 비유'는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자 기쁨으로 영접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모든 죄인을 용서...
    Date2002.07.09 Views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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