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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31일 성탄후 첫째주일> 성(城)과 말씀 느헤미야서 8: 1-12 |
이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마지하면서 지나온 일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아직도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크게 보면 희망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그간 우리가 너무 경제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거품들이 빠져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착실하게 경제를 꾸려 가면 우리의 살림살이가 그렇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남북 정상이 만나고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남북 간에 철로가 이어지는 일들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상쇄할 수 있는 희망적인 일들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만 판단되는 세계 속에서 민족의 중요성, 혹은 화해와 평화라는 가치를 보다 높게 평가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2000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경제를 부흥시켰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기념관까지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살시킨 민주주의 이념과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생각할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인 가치보다 경제의 가치를 높게 생각하도록 한 그 죄악을 생각할 때 그는 단죄되어야 마땅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것을 제일 가치로 믿는 기독인들은 더더욱 오늘의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어야 할텐데 그런 의식이 투철하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교회도 사실상 경제성장주의에 동조하면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교회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 그의 옹호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 나름대로 교회성장을 제일의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결국 교회까지도 타락시킨 간접적인 죄가 있습니다. 오늘 진행되는 사회 개혁은 단순히 경제적 구조조정만이 아닌 우리 가치관의 조정이며 의식의 개혁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개혁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교회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우리 믿는 이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올바른 교회로 서기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가 2000년의 주제를 '말씀 따라 이루는 새 천년'이라고 정한 것도 우리의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 그 말씀이 지시하는 역사의 목표를 바라보면서 거기에 맞추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꿔보자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물질주의, 경제성장제일주의 조류(潮流)가 너무나 거세게 흘러가기 때문에 이를 거슬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세워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물질보다 하나님 나라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결코 말씀 따라 살아가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의미 느헤미야서는 주전 445년에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파견된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활동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주도한 각종 개혁 활동에 대해서 언급한 책입니다. 전반부에서는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성공적으로 그 공사를 마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라도 다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굳이 예루살렘 성벽을 쌓으려 했던 느헤미야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성안에 있는 성전을 보호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상징적 도시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므로 잃어버렸던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인 이스라엘 북왕국과 유다 남왕국이 다 무너져 버려 사실상 그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하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위기 의식을 가지고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열심히 율법서와 예언서를 편찬하여 그 말씀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나라는 없어도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한 민족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로 엮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하였고, 그곳에 다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단순한 과거의 수도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선민의식과 그 신앙이 형성된 곳으로 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없어도 예루살렘이 필요했고 거기에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나라 없이 지낸 2천년 동안 언제나 유대인의 신앙의 고향이었고, 지금도 그 땅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영원한 도성으로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새 예루살렘은 우리가 들어갈 미래의 아름다운 도성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앙을 담을 일종의 그릇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라는 없어도 예루살렘과 성전만 있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그 신앙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악조건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던 느헤미야와 그를 따른 백성들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위해서 예배당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예배당이 있어야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고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제자매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배당은 우리 신앙의 본질은 아니지만, 그 신앙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은 바로 오늘의 예배당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사력을 다해 그 성벽을 수축(修築)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한 선민의식의 회복 느헤미야가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성하자 백성들은 광장에 모여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악조건 속에서 성벽의 수축을 완공하였기에 이제는 좀 쉬고 싶었을 텐데 오히려 광장에 모여들어 율법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건축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듣는 일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제 성(城)이라는 그릇이 마련되었으니 거기에 담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선민의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것은, 사실상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거기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삶을 개혁할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임을 저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그 안에 살거나 거기를 드나든다고 해서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삶을 완전하게 개혁할 때 진정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일 수 있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상징적으로 저들의 신앙의 고향이 될 수 있기에 열심히 건축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과정이나 수단일 뿐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 자체가 바뀔 때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선민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광장에서 에스라가 낭독하는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 애를 썼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저들을 택하시고 돌보시며 지키시고 그들을 통하여 새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면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그 율법에 명령된 것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율법을 들으면서 그들의 삶이 개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일을 큰 죄악을 간주하고 데리고 살던 이방 여인과 그 자녀들을 모두 내 보내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생활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여인들과 자녀들을 다 내보내도록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만큼 선민(選民) 의식의 회복은 어려운 것이었지만 또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의 행복이나 가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선민이라는 사상이 여기에 깃들여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 끼어 들어 이런 선민 의식을 약화시키면 결국은 그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강력하게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에스라가 읽어준 율법에 기록된 절기를 그들이 전혀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일곱째 달 보름에 있는 초막절을 당장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각자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마당이나 성전 마당에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절기를 지켰습니다. 절기를 회복하는 일은 그들의 역사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 역사를 회복함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선택되었으며, 어떻게 구원되었으며, 그들이 왜 선택되었는지를 알게 됨을 뜻합니다. 절기를 지키면서 그들은 그 과거의 구원의 역사를 오늘 여기에 재현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그 절기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가면서 잃어버렸던 그들의 선민 의식 내지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귀환하였고, 에스라와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고 느헤미야에 의해 성이 완전하게 복구되었습니다. 성전이나 성벽과 같은 외형적인 구조물과 더불어 포로 시절 새롭게 만들어진 율법을 들으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선민으로서 그들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사회 개혁을 위하여 필요한 일 이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을 보면서 오늘 우리 사회 개혁을 돌아볼 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은 포로 생활 혹은 그 이전부터 하나님을 떠나므로 선민으로서 그 본분을 잃어버려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였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선민 의식을 되찾고 율법을 따라 선민다운 삶을 이루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사회 개혁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물론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인간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서로가 협동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지만, 이런 이상이 사실상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경제가 발전하여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것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회 개혁도 실제로는 단순한 기업의 구조 조정에 머물고 있고 그나마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형편입니다. 대기업들이 문어발처럼 벌려 놓았던 회사들을 조정한다고 과연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 살기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쌓은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인 정비, 물질적인 번영, 눈에 보이는 문명의 발전만을 제일의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위해 모든 정책을 세우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만을 목표로 뛸 때, 거기에 과연 목표했던 이상 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가 빠져버린 물질 문명 위주의 발전은 오히려 암과 같아서 우리 사회의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외적인 문명의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인 성숙함 없이는 우리 사회가 균형 잡힌 건강한 사회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은 일에 만족하고 그쳤다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방 여인을 데리고 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선민의식은 실종되어버렸을 것이고, 성전은 있으나 형식적인 제사만 드려질 뿐 율법의 말씀이 빠져버림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유월절이나 초막절을 지키지 않으므로 해서 역사 의식마저 다 사라져 버려 결국은 주변의 나라들과 동화되었을 것이고, 결국은 선민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너무 크고 너무 화려한 성을 쌓았다고 하겠습니다. 최소한의 성이 아니라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을 성을 쌓을 욕심을 가지고 덤벼들어, 단시간 내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고 선진국을 따라 잡아 세계의 무대에 군림하는 나라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겉모양은 그럴듯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은 경제가 성장했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경제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 시민 의식 즉 세계를 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 의식인데, 우리에게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속에 나가 우리는 계속 망신을 당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 속에는 그 노벨 평화상이 지향하는 높은 이상과 가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노벨 평화상을 주면서 세계가 우리 민족을 향해, 너희도 이제는 경제보다는 좀더 높은 평화라는 이상을 향해서 노력하라는 훈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경제가 지난 한 해 동안 지지부진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일에 대하여 별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큰 성을 쌓으려고 했기에 이제 그 욕심을 줄여서 최소한의 성을 쌓은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쌓은 예루살렘 성은 52일 동안에 쌓은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최소한의 성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요약되는 영적인 가치 혹은 도덕적인 목표를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일에 우리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때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삶을 개혁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큰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보다 크게 생각하고 보다 멀리 내다보며, 보다 넓게 사랑할 줄 아는 자리에 이르도록 노력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제 지난 일년 동안 은혜로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 늦기 전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새해부터는 그 뜻을 받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