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11일 사순절 둘째주일> 육성설교(25:24)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스가랴서 14: 9-11 |
오늘 읽어 드린 갈라디아서 본문에 보면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말씀을 충격 없이 읽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로 거슬려 올라가서 이 말씀을 읽는다면, 상당한 충격을 주는 혁명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2천년을 거슬려 올라갈 필요도 없이 100년 전 반상(班常)제도가 분명했던 한국 사회에 살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만 이런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로마서와 고린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서도 같은 주장을 기록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롬 10:12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자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전 12:13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 3:11 오늘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을 보충한다면, '흑인이나 백인이나,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차별을 뛰어넘는 신앙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될 수 없는 높은 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방인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지도자들조차도 선뜻 이방 선교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오직 바울만이 스스로를 이방인의 선교사로 자처하면서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높은 담을 의식하면서 좀처럼 그것을 헐고 넓은 세계로 나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복음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벽을 과감하게 깨트리고 나갈 사도로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깊은 묵상을 하면서 깨달은 진리 곧 누구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세계 안에 있던 모든 사회적 신분적 차별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통해서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다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자유한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살았습니다. 빈번한 전쟁과 강대국에 의하여 점령되거나 다른 나라에 포로 되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국제화된 사회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방인을 가려 대화도 하지 않고 그들과 상종도 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차별의 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헐려지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로 만날 수 있다고 선언하므로 사실상 유대인들을 세계 속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바울은 종교적 이유로 나뉘어진 민족 간의 담을 헐 뿐 아니라, 당시 모든 민족들이 함께 가지고 있었던 노예제도나 남녀 차별의 문제까지 과감하게 도전하였습니다. 당시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동등할 수 없는 높은 차별의 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동물이 되지 않고 사람이 된 것, 사람 중에 남자가 된 것, 및 남자 중에 헬라의 남자가 된 것 세 가지를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남자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율법주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면서 그 신학이 점차 사회적 민족적 모든 차별을 넘어서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그의 몸을 이룬다는 만유 구원론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먼저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죄인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규정한 인간론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제까지는 사람을 민족이나 인종, 혹은 사회적 신분 또는 지식이나 재물을 가진 정도를 따라 판단하였으나 바울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임과 동시에 죄를 지어 타락한 존재로 규정을 하므로 이 세상의 차별을 모두 없애버리고 죄 아래서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규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서는 자신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바로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이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인종적, 성적 우월성을 내세우거나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능력 혹은 부를 자랑하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자들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세계 평화의 지름길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일단 모든 사람을 죄 아래로 끌어내려 평등하게 만든 이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습니다. 롬 3:22-24 여기서 믿음이 강조되고 있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사함이 가능하고 그 안에서만 하나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 세상에서 힘이 된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 즉 물질이나 지식이나 물리적 힘이나 인종적 우월성이나 혹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 같은 것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이런 모든 것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 즉 남녀노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땅의 모든 차별이 극복되고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평등하게 만나게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다"고 바울은 힘주어 적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그러면 바울은 발견한 진리대로 어떤 사회적 개혁을 시도했을까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남녀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그가 어떤 노력을 하였을까요? 바울은 실제로 그런 사회 개혁을 위한 어떤 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노예들에게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을 그냥 지키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들에게 대해서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하였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하면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1:2-8). 사도 바울의 이런 서로 모순된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라는 진리를 당장에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모습이기에 그 당장에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 제도의 개혁부터 주장한다는 것은 헛수고임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이지 정치가나 사회개혁자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널리 전하면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사회의 모순된 제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복음이 전파된 지 2천년이 지나면서 노예제도의 폐지나 남녀 평등에 관한 생각이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의 생각이나 방법이 옳았다고 하겠습니다. 2천년 후에나 실현될 어떤 진리를 2천년 전에 무리하게 실현하려고 했다면 바울은 역사적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돈키호테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변형된 노예제도나 다름없는 노사 관계가 여전히 있으며, 남녀 차별도 우리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좀처럼 뽑혀지지 않고 있음을 볼 때,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리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때까지 계속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라는 목표는 진행중이며 따라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도는 나중이고 우선 의식의 변화부터 이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에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하면서 "당신은 노예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런 것에 마음쓰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노예는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7: 22-24). 몸의 자유보다 의식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와 통합되겠지만, 그 때까지는 서로 갈등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대립적 두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대립된 두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가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한편으로는 궁극적 진리인 복음을 열심히 전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진리를 따라 오늘 이 땅의 모순된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식 개혁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입니다. 남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다는 생각,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대신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한다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의식이 바뀌면 거기로부터 생활의 변화가 시작되고 가정과 교회가 민주화되며, 그런 의식들이 모여서 시민 운동으로 전개되면 사회가 바뀌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됨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사회 속에 있는 차별 의식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선언하였지만, 그가 말년에 옥중에 써보낸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깨달은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을 이룬 만물,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만물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마지막 때를 내다보며, 바울은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사상은 단순하게 인간의 평등이나 만물의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래서 나뉘어서도 싸워서도 아니 되는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음을 뜻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너무나 큰 진리이며, 너무나 큰 이상입니다. 인류의 하나됨도 요원한 일인데, 만물이 하나됨은 더욱 어렵고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천년 전에 이미 이런 미래를 내다보았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위대하고 큰 사도였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이상으로 갖기조차 힘든 놀라운 신앙의 목표를 이미 그 시대에 깨달아 알고 그것을 열심히 교회에 편지로 써 보냈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원대하고 우주적인 신앙과 신학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생각은 너무 옹졸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편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원대한 목표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 치부하면서 스스로 낮아져 작은 꿈, 소박한 신앙에 만족하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개혁되지 못하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년이나 2천년 후에 이루어질지 모르는 너무나 큰 목표이지만, 힘있게 선포하고 열심히 편지로 써 남겼던 사도 바울처럼, 비록 우리가 이루기에는 너무나 멀고 큰 목표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라는 확고한 믿음과 의식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그 목표를 위하여 기도하며 노력할 때 이 교회가 변하며,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목표로 교회가 세워졌고, 그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 목표는 단순히 이 교회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함에 있음을 늘 기억하면서 이 원대한 목표를 향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또 개혁하는 일에 앞장 서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의 의식이 바뀌고 여러분의 생각의 범위를 넓혀서 멀리 크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 우리 사회에 깃들여 있는 모순과 문제를 개혁하는 일에도 발벗고 나서며, 자연을 살리고 환경을 보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깃들여 있는 잘못된 문화를 바꾸어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생명 안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여러분에게는 더욱 큰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헌신하심으로 가정과 사회 더 나아가 이 민족을 새롭게 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