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8일 고난주일> 육성설교(23:12)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 | |
이사야서 53: 1- 6 | |
요한복음 19: 1-16 |
오늘은 종려 주일로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동안 교회가 종려주일로 지키면서 막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고난주간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흘만에 다시 사셨기 때문에 종려주일에 이어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곧장 부활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인 오늘을 고난주일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십자가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보면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악의 폭력의 상징인 십자가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신학적인 측면에서만 살펴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악의 모든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시므로 우리 인간의 죄가 대속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이루어졌다는 등의 설교를 여러 번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십자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를 너무 신학적으로만 생각하므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난 사건 자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가의 신학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십자가의 현실을 너무 소홀히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의 사건입니다. 체제 종교가 저지른 씻을 수 없는 폭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깊은 진리를 설파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하나님의 아들을 정치적 판결에 의해 죽음에 내어준 사회적 정치적 범죄의 전형입니다. 대만의 신학자인 C. S. Song(宋泉盛)의 <예수, 십자가에 달린 민중>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악령의 힘에 잡힌 인간이 서로 얼마나 부정을 행하는가, 얼마나 서로를 분열시키고 얼마나 서로를 멸망시키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십자가는 권력과 정통주의에 의해서 바로 볼 수 없게 되고 만 체제 종교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되찾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는 깊고 진실된 신앙적인 사람들을 허용할 수 없는 체제 종교의 음모이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나타내고 있는 사실은 어떠한 희생이 있어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는 사회 정치적 권력의 범죄이며, 법률마저도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격려 받아 진리에 충실히 살려고 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헌신한 사람들의 생명마저도 희생하는 권력의 범죄이다. … 십자가는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기보다는 정치적 방편을 중요하게 생각한 정치권력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십자가의 구속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단 사람들의 음모와 죄에 대해서는 지나쳐 버렸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요한복음 말씀에 보면,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어떤 정치적인 죄도 찾아내지 못하여 군중들 앞에 나와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라고 말하자 대제사장들과 그들에 의해 선동 받은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겁이 나서 다시 들어가 예수님을 심문하였으나 별다른 것을 찾아내지 못한 채 재판석에 앉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요구대로 판결을 내리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어떤 나라보다도 법이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총독이 피고의 어떤 범죄도 찾아내지 못한 채 극형인 십자가형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식민지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죄 없는 사람을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말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종교지도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선동을 받은 군중들의 함성에 밀려서 사형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은 중대한 과오임과 동시에 정치가 얼마나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는 것인가를 아주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였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정치적 범죄가 수없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사정권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였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아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이란 악법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정치란 언제나 인간의 생명을 말살하는 악의 하수인 노릇밖에 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계속해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더욱 무서운 악의 음모임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은, 야훼 하나님의 선민으로 그가 주신 율법을 따라 살아왔으며, 그들의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예언자들이 저들에게 남긴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매어 달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너무 견고한 틀 속에 넣어버렸고, 오랜 전통 속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전혀 융통성이 없었으며, 역사를 올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며, 저들이 알지 못하였던 하나님의 세계를 거침없이 말씀하실 때, 굳어진 틀 속에 갇힌 유대인들에게는 체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켜온 전통과 틀을 벗어나서 예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이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느꼈으면서도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간직하여온 틀을 가지고 판단하여 버리므로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체제 종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오류이며, 이것은 오늘날에도 수구적인 종교 체제 안에서 마찬가지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 이들의 죄악이 큰 것은 바로 진리와 생명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도전한 것입니다. 만물을 구원하여 그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딴지를 건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 주어서 영생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훼방한 것입니다. 어둠으로 덮인 이 땅을 다시 하나님의 빛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파토를 놓으려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계속하여서 생명을 파괴하고 진리를 그릇되게 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법과 나름대로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도전하고 그 생명의 역사를 훼방하며 진리를 왜곡(歪曲)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에도 계속 이런 악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부시정권이 힘을 앞세우면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전지구적인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위기에 몰아 넣은 일이라든지, 국가 미사일 방어체제(NMD)를 구축하겠다고 하므로 한반도를 비롯해 동북아,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일은 또다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을 위협하고 말살하려는 모든 정책, 모든 기획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 십자가 사건이며 무서운 범죄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인간의 무서운 죄악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저질러진 이런 인간의 무서운 음모와 죄악을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면서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이념이나 종교적 교리나 체제에서 속히 벗어나 생명의 역사를 일구시는 하나님의 폭넓은 사랑을 깨닫는 자리에 나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은 왜 자기를 향하여 반기를 드는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두셨을까요?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하여 주장한 응보(應報)의 하나님이시라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단번에 심판하시고 저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셨을텐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아드님의 절규를 왜 못들은 채 하셨을까요? 앞에 인용한 송박사의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같은 비인간적 사건, 영원한 의이며 한없이 자애로운 예수를 십자가에 다는 일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범죄는, 하나님이 이에 대하여 다만 말씀하시는 것만이 아니다. 절규해야 하며, 듣기만 할 게 아니라 행동해야 하며, 생각하기만 할 게 아니라 구하러 오셔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창조 때부터 끊임없이 말씀하여 온 하나님이 돌연 말하는 것을 그만 두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예수의 도움을 요청하는 마지막 절규에 대답하지 않으셨을까요? 마땅히 악한 자들을 처벌하려고 행동하셨어야 할 하나님이 도리어 침묵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송박사는, 그것은 영원한 미스터리라고 하면서 다만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너무 큰 쇼크 때문에 침묵하셨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 특히 정치권력과 결탁한 종교권력이 무죄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포악할 수 있을까 하는 데서 하나님은 쇼크를 받고 침묵했음에 틀림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거침없이 십자가에 못박는 무서운 인간의 포악함과 잔인함에 어안이 벙벙하여 침묵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둘째로, 하나님은 너무나 슬픈 나머지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깊은 슬픔을 만날 때 할 말을 잃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슬픈 나머지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인간의 뻔뻔함과 무자비함과 야비함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도 정치가들의 그 뻔뻔한 얼굴을 대하는 것이 역겨운데 하나님인들 왜 안 그러시겠습니까? 서로 총회장이나 감독이 되려고 돈을 물쓰듯하면서도 가장 경건한 체 하는 교권주의자들을 우리도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침묵은 항의(抗議)의 침묵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이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데 이르렀음을 인간들로 하여금 적나라하게 보게끔 하시기 위하여 침묵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 더 보태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긍휼의 침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막지한 죄악을 보시면서 그 죄악까지도 감싸안으셔서 마침내 생명의 역사를 일구어내시겠다는 긍휼의 침묵이라고 하겠습니다. 긍휼이란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감당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악을 행한 자들에게 진노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포악함과 무자비함의 죄가 비수가 되어 자기의 가슴을 찌르지만, 그것을 참으시면서 그의 긍휼로 그 죄악을 포용하고 마침내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게 하시기 위하여 침묵하셨던 것입니다.이것은 이미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이 참으로 무섭고 깊은 것임을 아셨지만, 그것까지도 감싸안지 않고서는 만유의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다고 보시고, 아들로 하여금 그 모든 죄를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침묵은 무서운 인간의 죄를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을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하여 녹여버리시는 뜨거운 용광로와 같은 침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때에 침묵하시므로 마침내 모든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다함께 살려내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시는데 성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침묵은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종교권력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을 직접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시므로 마침내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을 녹여내어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여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침묵 속에 담긴 그의 무한하신 긍휼을 깨달아 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서운 십자가가 아닌 사랑의 십자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는 울분하고 원통해하며 우리의 힘없음을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불의한 십자가 사건이 수없이 일어남에도 침묵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이 때에 우리는 응보의 하나님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침묵하시면서 그 모든 죄악을 자기 안의 품어 뜨거운 불로 다 녹여버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바라며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강대국들의 정치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침묵으로 지켜보시는 것은 그것을 용납해서가 아니라 그 죄악이 얼마나 크며 무서운 것인가를 모든 인류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면서 동시에 그 무서운 죄악을 그의 아들을 통하여 모두 없애고, 평화와 화해, 사랑과 진리가 꽃피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만드시기 위하여 침묵하고 계심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무서운 죄악이 넘쳐나고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멋모르고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 주변을 어정거리면서 야비한 웃음을 머금고 소리치는 포악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제 온갖 비난과 폭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굳게 잡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진리와 생명의 파수자가 되어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