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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15일 감사절 일곱째주일> 모두 예스(Yes) 시 편 145:9-21 |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성육신(成肉身)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모두 성취시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란 타락하여 죽음에 떨어진 인간과 만물을 모두 구원하여 완전한 생명의 세계로 회복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생명의 세계를 온전한 생명의 세계로 바꾸어 놓으시는 역사입니다. 불순물이 끼여들어 더러워진 세계를 다시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를 말합니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죽음과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생명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어떤 죄도 다 사함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도 극복되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나 문제도 다 해결되면서 희망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됩니다. 모든 것이 긍정됩니다.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걸림돌이며 무거운 짐이었던 죄와 죽음이 해결되면 그 나머지 모든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이 놀라운 생명의 은총에 오직 '아멘'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아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시편 145편 9절에 보면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고, 모든 피조물에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모두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어찌 저들을 은혜로 맞아 주실 수 있겠으며, 긍휼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14절 이하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넘어지는 피조물을 모두 붙들어 주시며, 짓눌린 모든 사람을 모두 일으켜 세우신다. 만물이 모두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리니, 주께서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신다. 주께서는 손을 펴시어서, 살아 있는 피조물의 온갖 소원을 만족스럽게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의롭다. 주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 시 145:14-17 이 말씀에 보면, '모두' '모든' '만물' '온갖' 이런 단어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부분적으로, 특정한 사람이나 피조물에게만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예외 없이 허락하시는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약한 자, 고난 당하는 자를 모두 일으켜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는 항상 뒷전으로 밀리고 멸시 당하고 버림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던 자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잘 살고 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하여 소외되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모든 피조물을 완전하게 구원하시어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만드신 피조물을 일부 떼어내고 일부 폐기(廢棄)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악을 저지른 자에 대하여 심판을 하시지만, 그 심판도 따지고 보면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그 자녀를 잘 되게 하고자 함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도 구원을 위한 채찍일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악한 자들도 다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분한 은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가 만물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모든 피조물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는 충분한 은혜였습니다. 모든 죽음을 몰아내고 대신 생명을 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이 한계가 있었다면 구원받을 피조물을 선택했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피조물과 그렇지 못한 피조물을 구별하여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은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 남을 만큼 충분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굳이 가려서 구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는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10-11). 십자가에서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벽한 생명의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가 한치의 차질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천년과 하루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도 오늘의 세계는 여전히 악이 성하고 전쟁이 있으며, 온갖 질병과 문제들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인간의 욕심으로 피조물이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2천년이나 되었는데 어찌하여 세계는 변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까닭일까요? 이런 질문은 예부터 있어 왔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부터 그냥 그대로이다"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베드로후서는 이렇게 하였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시간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간과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도 그 시간을 넘어 있는 것들에 대하여 미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이 역사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당장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지금 여기에 화해와 평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모든 불의와 악이 사라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 당장 동서와 남북의 갈등이 극복되어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정착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독교 역사 2천년이 지났고, 이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되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음에도 화해와 평화, 정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너무 이 시간 속에서만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이 역사 속에 국한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를 넘어 영원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그 영원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계획을 영원을 생각하시며 짜시고, 그 계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이후 성령을 통해서 오늘까지 계속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 속에서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세계에 평화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실패하였다고 보는 것은 너무 인간 위주의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당장 내 병이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너무 좁은 생각이며 단견(短見)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부자가 되지도 못하고, 바라는 명예도 얻지 못하고, 별로 행복한 생애가 되지 못하였다고 해서 헛 믿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영원을 바라보지 못한 짧은 안목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예'가 된다고 하여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건강하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역시 너무 그 믿음을 이 땅에 사는 삶에만 국한시킨 결과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땅의 삶은 영원한 삶의 지극히 짧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성취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 따라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의 생각을 이 시간 속에 고정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까지 확장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믿음을 갖고 그 성취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에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꿈을 잘 꾸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그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낙심하거나 흐트러짐 없이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오해를 받아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언제 그 감옥에서 나올지 기약이 없었지만 요셉은 거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 이집트 왕의 꿈을 해몽해주고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가족을 모두 이집트로 이주시켜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권력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는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삶을 이 땅에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는 참으로 통 큰 정치를 할 수 있었고, 형제들에 대하여 너그러울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삶을 짧은 생애 속에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미래까지를 내다보며 살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고 행동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영원 속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 땅의 삶에 매인 우리의 생각의 폭을 넓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의 삶에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하여도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완전한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드리실 것입니다. 13일 우리 김대중 대통령께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에 찬 역정을 걸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비난과 반대 속에서도 꾸준히 평화통일을 위하여 걸어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저는 요셉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가시밭길을 헤쳐오면서도 결코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굽히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도전한 끝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또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김대통령께서 노르웨이 TV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짤막한 한 마디로 그의 신앙을 표현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의는 당대에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왔다. 역사의 교훈을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상을 받고 보니 현세에서 과분한 보상을 받는 것 같다." 김대통령은 우선 자기 당대에서 어떤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정의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에서 과분한 보상을 받는 것 같다'는 표현에서 그는 자기의 삶을 현세 즉 이 땅의 삶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영원까지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예'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와 죽음이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 땅의 짧은 생애에서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되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나라의 신령한 모든 복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땅의 삶에서 고난 당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병들었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죽음을 맞는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모두 긍정될 것입니다. 고난까지도 합하여 마침내 선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삶은 모두가 '예스(Yes)'가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의 짧은 삶에 매어 근심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 잡혔던 삶에서 벗어나 영원을 바라보며 거기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항상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