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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19일 감사절 열둘째주일> 깊이 생각하는 신앙 시 편 119:32-40 |
우리 안동교회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유성준(兪星濬) 장로님이 "深思하자" 곧 "깊이 생각하자"란 글을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歐洲大戰이 종결된 후로 20세기 풍조에 搖揚漂蕩하는 우리 동포여 思하자"라고 시작된 글에서 "深思하여야 擇할 力이 生하고 執할 能이 잇슬 것이다. 深思하여야 辨할 智가 生하고 斥할 權이 잇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깊이 생각하여야 택할 힘이 생기고 붙잡을 능력이 있을 것이며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생기고, 아니라고 할 용기가 생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선을 택하여 행하고 악을 버릴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깊이 생각하므로 얻는 능력의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깊은 생각 없는 민족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정적(情的)인 면이 강한 반면 지적인 면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즉 사고하는 습관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나 경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도 깊이 생각하면서 논리적으로 일을 풀어가기보다는 폭로하고 비방하고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운영을 보아도 합리적으로 운영되기보다는 무조건 돈을 끌어다가 쓰고 보자는 식의 운영으로 결국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부실기업으로 정리되곤 합니다. 그런가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깊이 연구하여야 할 학계조차도 이론적인 토론보다는 인맥(人脈) 학맥(學脈)을 중심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을 봅니다. 교계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매년 갖는 교단 총회의 뜨거운 주제는 선거에서 '누가 총회장이 되느냐' 입니다. 지난번 우리 교단 총회에서도 21세기를 맞는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 교단 신앙고백서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만들었는데, 별 논의 없이 그대로 1년간 더 연구하도록 하고 끝내버렸습니다. 지극히 소수 사람들만이 그 신앙고백서를 읽어보았을 뿐 대부분의 총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금년 초부터 문제로 떠올랐던 추도예식에서 절하는 것에 대해서도 신학적인 논의보다는 무조건 안 된다는 우격다짐 식의 소리만이 전체를 지배하였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신학이 발전하기 어렵고 교회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신학자들이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교단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패거리를 이룬 목사나 장로들이 좌지우지하는 풍토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나오기는 어렵고 그 교단이 개혁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의 진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거기에 새로운 발견, 새로운 신학이 나타날 수 있는데, 무조건적인 수구세력들이 판을 칠 때 그 교회는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신도들도 깊이 생각하면서 믿는 신앙이 아니라 무조건 '아멘' 하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부흥사가 욕을 해도 '아멘'하고, 연발하는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는 말끝에 무조건 '아멘'하는 생각 없는 평신도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수는 많아도 그 질이 형편없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두 가지 방법 우리가 예수를 믿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진리를 깊이 몰라도 무조건 믿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의심하지 않고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내 죄를 대속하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내 죄가 대속 된다니 감사하면서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모르지만 무조건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처음에는 무조건 믿었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부활이 어떤 상태로 언제 이루어지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하나 따져보고 연구하면서 믿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주로 전자의 방법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무조건 믿고 아멘 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열정이 있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단자들이 나와서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며 유혹할 때에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어서 쉽게 넘어갑니다. 무조건 아멘 하고 쉽게 박수 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단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면서 열심을 냈는데, 커진 교회가 한다는 짓이 세습이나 아니면 아들에게 교회나 사업체를 만들어 주는 등의 엉뚱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그것이 잘못인 줄 깨닫지 못하고 무조건 따르고 있습니다. 따지고 캐는 것보다 그저 덮어두고 넘어가는 것이 교회 평화를 위해서 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가 개혁되지 못하고 계속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인지 사람의 욕심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 오늘 읽어 드린 마가복음 8장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엉뚱하게 빵을 가져오지 않은 일에 대하여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렇게 가까이 예수님을 모신 제자들도 헛된 정치적 욕심에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의 말씀의 본뜻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조금만 생각하여도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을텐데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영적인 것을 생각할 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로 비유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훈련시키신 것이기도 합니다. 비유란 이야기를 통해 어떤 진리를 전하는 수단인데, 생각을 해야만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미처 몰랐던 하늘의 비밀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사고의 범위를 넓혀주셔서 이 땅의 것만을 생각하던 머리로 영적 세계까지 생각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의 범위가 하늘에까지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경험과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령의 깨우치심을 통해 영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드리게 되면, 그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길 물 속에서만 살던 물고기가 깊은 바다에 이르게 되면 한길 물 속에서 볼 수 없었던 신비한 세계를 보는 것처럼, 이 땅의 것만 생각하고 그 논리대로 살던 우리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넓고 신비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 우리의 생각도 그만큼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면서 전에 생각하지 않던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과 그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잘못되기 쉬운데, 하물며 전혀 생소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일은 더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게 된 후로는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땅에서만 보던 세상을 비행기 타고 내려다 볼 때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지극히 작고 낮은데서 나의 삶만을 생각하다가 하나님 안에서 나의 삶을 보게 될 때 그리고 이 땅의 역사를 보게 될 때 그것은 지극히 큰 세계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문제가 커 보여서 근심하며 걱정하던 일도 하나님 안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작고 별 것 아닌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깊이 생각하려면 따라서 깊이 생각하려면 전에 가졌던 얕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하는 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전에는 땅에서 땅의 일만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하늘에서 하늘과 땅의 일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앙과 과학이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만을 생각하고 연구한다면, 신앙은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기에 그 선 자리가 다르고 그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과학은 따라서 자기들이 경험하고 실험할 수 있는 범위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으로 바라보는 세계에 대하여는 무시하거나 도외시 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과학을 함께 보기 때문에 그 과학을 하나님의 세계의 일부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훈 하시고 하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그 사람들이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니고데모는 철저하게 이 땅에 속한 사고를 하였고,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방식으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당시 사람으로는 꽤 생각하는 축에 속하였음에도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뛰어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이 땅에 속한 율법주의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늘 나라의 사고방식을 재빨리 받아드렸습니다. 사도 바울만큼 깊이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비롯한 서신들은 편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깊게 그 복음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과거의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새로운 사고의 자리에 올랐고, 거기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시편의 기자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의 이해력을 더욱 더하실 것이니, 내가 주의 계명이 지시하는 그 길을 달려가겠습니다. …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가 주의 법을 살펴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겠습니다. … 내 마음이 주의 교훈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의 길을 걸어 생명을 얻게 해주십시오 이 땅의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서 이 땅의 사고방식과 논리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사고방식, 그 논리를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이 넓어지고 삶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가볍게 떠도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이 땅의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기 때문입니다. 경제 성장 논리를 따라 교회성장을 서둘렀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 논리를 따라 교회 정치를 하기 때문에 총회장 선거에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업의 논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에 세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이 땅의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복을 받겠다고 덤벼들기 때문에 하늘을 빙자한 엉터리 목사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내노라는 지식인들이 이단 사상에 쉽게 끌려가는 것은 하늘 나라의 영역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늘 나라는 목사들이나 사제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거듭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그 세계를 배우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길 물 속밖에 되지 않는 이 땅의 사고 방식 대신에 바다같이 깊은 영의 세계를 헤엄치면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아무 때나 생각 없이 '아멘'을 남발하지 말고 정말 '아멘' 해야할 때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들이 사기꾼인지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인지 올바로 분별할 수 있도록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가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폭풍우 같은 환난이 몰아닥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이 땅의 고난을 헤쳐나가며 늘 감사와 기쁨에 넘친 삶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하늘의 자리에서 영의 세계와 이 땅을 함께 보면서 깊이 생각하므로 요동하는 세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갖고 살아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