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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4일 대림절 넷째주일> 성탄을 통해 바뀐 역사 이사야서 9: 1- 7 |
오늘이 대림절 넷째 주일이지만 내일이 바로 성탄이기 때문에 성탄 인사와 함께 성탄에 관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탄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시므로 시작된 은혜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감사 드리고자 함이요, 오늘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도 성탄의 의미는 변함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찬양 드리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변하는 세태 속에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변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철모르는 어린이처럼 기뻐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별로 성탄의 의미를 새겨 보지도 못한 채 무심히 지나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이 어려운 때는 성탄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성탄은 더욱 깊은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 의미를 바로만 파악한다면 성탄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을 통해 변화된 역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9장은 유명한 메시야의 예언으로 특히 헨델의 '메시야' 합창을 통하여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내용은 전에는 고통 당하고 멸시받던 나라, 압제자의 억압 밑에 신음하던 나라에 아기가 탄생함으로 변화되어 그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넘치는 평화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마치 암흑과 혼돈 가운데서 갑자기 빛이 나타났다는 창조의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고통과 흑암은 갑자기 즐거움과 빛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압제의 멍에가 벗겨지고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피비린내로 덮였던 전쟁 마당이 영원한 평화와 공의의 나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거기에 한 아기가 탄생하였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7장 14절에서 이미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새롭고 극적인 행동의 표적으로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는 이미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 민족의 역사에 개입하실 때 한 아기가 탄생하였던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바로 그런 아기들이었습니다. 모세의 탄생은 곧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역사에 직접 개입하심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모세의 탄생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였습니다. 사무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탄생은 사사시대에서 왕국시대로 넘어가는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남쪽 유다에서 예언할 당시 북쪽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의 말발굽에 의하여 형편없이 유린되고 있었을 때입니다. 주전 733년 앗수르의 왕 티글랏 빌레셀 2세가 침공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는 갈릴리의 모든 땅을 약탈하여 앗수르의 영토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흑암이 그 땅을 덮었고, 사망의 그늘이 드리운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망의 세력은 거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이제 점점 더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때에 이사야는 메시야의 예언을 터뜨렸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가 달라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역사가 희망의 역사로 바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서 11장의 메시야 예언에서도 이와 같이 변화될 역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와 전쟁의 역사가 끝나고 만물 가운데 평화가 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물론 이스라엘에 국한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있은 지 7백년이 지난 후에 한 아기가 탄생하였고, 이 아기의 탄생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의 개입을 뜻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바로 이사야 예언의 성취로 보았고, 그 이후 모든 크리스찬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말하고 있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에 빛이 비취었다고 하였습니다. 재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율법의 시대는 끝나고 은혜와 진리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한 생명의 단순한 탄생이 아니라 새 역사의 시작을 이룩하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입니다. 불안과 공포와 절망만이 지배하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사랑과 희망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캄캄하던 역사 속에 빛이 비취기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절망만이 지배하던 세계 속에 희망이 자라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각박한 사회 속에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전(紀元前)과 기원후(紀元後)를 나눈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이 세계 역사 속에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달라진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흑암의 역사에서 광명의 역사로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흑암의 역사가 끝나고 광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것은 처음 창조 때에 일어났던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흑암만이 덮여 있던 세계 위에 빛을 창조하심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탄생으로서 그것은 이 세계 역사의 재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을 뜻하는 것이고 어두움은 죽음을 뜻합니다. 빛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면 어두움은 불안과 공포를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빛은 긍정적인 역사를 의미한다면 어두움은 부정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역사는 죽음과 공포와 절망이 지배하는 역사였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역사는 어디에도 희망의 빛이란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어두움의 역사는 예수 오시기 이전에만이 아니라 예수 오신 이후인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흑암의 역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광명의 역사도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역사와 다른 점입니다. 아직 완전히 흑암의 역사가 물러가고 빛의 역사만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의 역사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둠의 역사를 빛의 역사로 바꾸는 일은 어렵고 힘들며 고군분투(孤軍奮鬪)하지 않으면 안되는 험난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순간 어둠이 모두 물러가고 빛의 역사로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닙니다. 빛의 역사가 선포되면서 오늘까지 계속 빛과 어둠의 역사가 대결하면서 빛의 역사를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빛의 역사를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인내로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매년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빛의 역사를 일구어 내기 위한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우리 속에 밝혀진 빛을 더욱 북돋우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뜻깊게 맞이하는 길은 우리가 주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인하면서 어두움의 일은 벗고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아직 어두움에 사는 자들에게 빛을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더욱 그리스도의 빛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취어 절망의 밤에 갇혔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어 빛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물결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평화의 역사로 둘째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쟁의 역사에서 평화의 역사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사야는 특별히 메시야 예언을 통하여 평화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벗어날 길 없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갈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들이 갈망한 평화는 전쟁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다. 이사야서 2장에 보면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근본적으로 전쟁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평화의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에서도 적대적인 관계가 없어지는 완전한 평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자와 같이 사나운 짐승들과 어린양과 같이 순한 짐승들이 함께 풀을 뜯을 것이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을 하는 평화의 시대를 꿈꾸었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으로 이런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바라보면서 그 아기는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유능한 정치가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뛰어 다니며 평화를 이룩하도록 협상하는 그런 평화의 왕이 아닙니다.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먼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수 된 인간들 간에 담을 허시고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에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오셔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므로 평화의 길을 트신 것입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무서운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또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사야 말씀에 있는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평화의 역군으로 부름 받았으므로 분쟁 세력들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 가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과 남북 민족 간의 갈등을 화해로 이끌고 마침내 평화로운 통일을 이룩하는 일에 우리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시험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탄은 이런 사명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역사에서 은혜의 역사로 끝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율법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시대는 구약의 시대를 말합니다. 물질적이요 현실적이며 타산적인 그런 시대입니다. 은혜가 없는 시대요, 심판과 정죄(定罪)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는 이런 역사가 바뀌어 용서와 사랑이 바탕이 되는 은혜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탕진한 탕자를 기쁨으로 영접해 주시는 사랑의 시대요, 마지막 시간에 포도원에 들어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처음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은총의 시대입니다. 강도가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살인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지금도 이런 은혜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리로 들어오는 사람은 영접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드려집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런 은총이 없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즉각 처벌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할 때는 즉각적으로 외적의 침략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가 회개하고 그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과거의 행위를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성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흑암이 빛으로, 전쟁이 평화로, 율법이 사랑으로 바뀌는 역사의 전환입니다. 지금 비록 이 세계가 전쟁의 불안과 인구의 증가와 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파괴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 때문에 절망의 어두운 구름에 덮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럼에도 빛과 평화와 사랑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또 마침내 그것이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오늘 절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새 희망을 물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피곤하여 넘어지려는 우리에게 새 힘을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의 역사적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 때 우리는 이 세계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쪼들린 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개척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를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더욱 뜻 깊은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과 희망과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