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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22 15:32

모든 힘을 버리신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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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4월 16일 고난주일>
   육성설교

모든 힘을 버리신 종

이사야서 53: 7-12
 빌립보서  2: 1-11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런 모습은 전쟁에서 이기고 온 개선장군이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는 모양과 닮은 것입니다만, 예수님은 군마를 높이 타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셨고, 그의 뒤에는 씩씩한 군인들이 따른 것이 아니라 초라한 제자들 몇 명이 따랐을 뿐입니다. 호산나 부르며 이들을 맞이한 사람들은 갈릴리 촌구석에서 올라온 사람들 일부와 어린이와 병자들 몇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입성은 여러모로 당시 로마의 개선장군들이 로마에 입성하는 모습과 너무 대조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평화와 비교되는 예수의 평화

    로마의 장군들이 로마성에 보무 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은 그들이 격렬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모습을 흉내내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로마 개선장군의 입성이 로마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많은 전쟁에서 강력한 군대를 이끌며 승리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예수의 평화는 그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므로 사탄을 물리치신 결과로 이룩된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업적물인데 반해 예수의 평화는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평화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이룩된 것이지만, 예수의 평화는 반대로 그 로마의 막강한 힘에 의해 희생되므로 이룩된 평화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초라한 예루살렘 입성은 막강한 군사력이나 정치적 권력 같은 것은 모두 포기하고 완전한 무방비 상태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행렬이 완전히 희극적인 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와 같은 이 땅의 나라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아울러 뛰어난 정치력 그리고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워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모든 힘이 거부되고 오로지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렇게 초라하였고, 그에게 나온 사람들은 맹인과 저는 자들 그리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르는 어린이들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병든 자들과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어린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시민의 표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존의 모든 힘을 거부한 것이며, 기존의 모든 종교적 세력을 거부하신 사건입니다.

    무슨 권위로?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어리둥절하였으며, 이런 사람이 메시야라고 믿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성 후 성전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런 행동을 보고 종교지도자들이 나와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막강한 힘이나 혹은 수만 명의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왔더라면 무슨 권위로 그러는지를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권위도 없어 보이는 예수가 너무도 당당하게 메시야처럼 행동하니까 그 권위의 근거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 땅의 통치자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한 권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고 오직 행동으로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입성 후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자기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고,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은 오지 않고 버림받은 자들이 오히려 그 잔치 자리에 앉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타국에 가서 추수시기에 종을 보냈는데 농부가 그 종들을 죽이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이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듣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바로 당신들이 악한 농부들이며 당신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당신들이 나를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버리지만 바로 나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신랄한 비유를 이 세상 힘의 논리에 젖은 종교지도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들의 눈에 예수님은 한낱 몽상가요 귀신 들린 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우신 하나님의 아들

    오늘 읽어 드린 이사야서 53장 말씀은 고난받는 야에의 종의 노래이고 , 빌립보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완전히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빌 2:6-7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권위와 영광과 능력을 그대로 갖고 오시지 않고 그것을 다 비워놓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종의 모습'이란 권위도 영광도 능력도 없는 초라한 모습을 뜻합니다. 이사야서 53장 1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그 놀라운 창조의 능력도, 눈부신 하늘의 영광과 위엄도, 아름답고 멋진 풍채도 모두 쏟아놓고 완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종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땅의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뚜들겨 맞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완전 무장해제 당하신 채 오셨습니다. 비유하여 말하면, 총알과 대포가 빗발치는 전쟁터 최일선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싸우러 나간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그 전쟁에서 죽으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죽기 위해 오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전쟁하러 오신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무장 없이 적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에 터벅터벅 나귀 타고 들어가시다니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적의 소굴에서 붙잡혀 고초를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 53:7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사 50:6

    그는 아무 힘없는 종처럼 무방비 상태로 가해지는 모든 고난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대로 행동하셨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런 나약한 종교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힘을 숭상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요즈음 같이 세계가 하나의 촌이 되면서 가진 자의 막강한 힘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때에 가진 것마저 나누어주고 가난한 자, 무기력한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저들의 귀에 들릴 리가 없습니다. 힘을 숭상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해야 할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렇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믿음도 없고, 용기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순이며, 극복하기 힘든 높은 장벽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며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런 예수님의 본을 따라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비폭력 지향적으로 나가는 대신에 기독교의 세력을 점점 확장하여 정치계에 영향력을 구축하고, 사회 전반에 들어가 무시 못할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으려 합니다. 우리도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고, 막강한 힘이 가져오는 놀라운 효과에 매혹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그 교세를 배경으로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며 기독교가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바로 이런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다시 겸손하게 내려앉아 자기를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며, 모든 기득권이 가져오는 온갖 혜택을 거부하고 모든 기득권을 잃고 당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교회의 참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힘든 고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한 채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에게 고통을 가하는 모든 자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넘치는 힘이 있음에도 그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모욕을 당하고 고초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괴력을 발휘하던 삼손이 머리를 깎인 이후 아무 힘도 못쓰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들려 두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혀 연자방아를 돌려야 했을 때 삼손을 괴롭힌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막강한 힘을 잃어버린 자기의 무기력함에 대한 통한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원래 그가 가지셨던 성자로서의 능력은 비웠다 할지라도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므로 죽은 자도 살리시고 바다도 잔잔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 능력으로 그는 능히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고난을 감수하셔야 했을 때 그것이 더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고통을 잘 표현한 박두진의 "갈보리의 노래 Ⅱ"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여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 꽝 쳐 못을 박고 창 끝으로 겨누고, 채찍질 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으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 신인 줄을 믿었는가? 크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가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 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잣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여! 인자여! 마지막 쏟아지는 폭포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을 때 그는 어쩌면 자기 속에 있는 능력을 사용하여 그 십자가를 비껴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힘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고통을 참아내신 그의 인내 속에 참된 승리가 깃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그의 아들을 철저하게 아무 힘도 없는 종으로 그를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가지셨던 모든 능력과 위엄과 영광을 다 비우게 하고 비무장 상태로 살벌한 전쟁터인 이 세상에 보내시어 죽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가 만물을 대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의 죽음을 통해서 만물의 죄값을 받으시고 만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사야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사 53:5-6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사 53:11

    하나님은 보다 강력한 힘으로 사탄을 제압하실 수 있었으나 그 반대로 모든 힘을 빼어버린 고난을 통해서 사탄을 제압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힘에 의한 통치가 아닌 사랑의 통치로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결국 사랑의 힘이 이 땅에 있는 어떤 힘보다 더 강하고 더 아름답고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피조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난과 인내와 승리 때문에 기독교는 모든 힘과 권력과 폭력을 거부하고 사랑을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랑의 힘은 이 땅의 모든 힘을 거부하고 확신과 용기를 갖고 모욕과 고통을 끝까지 참아낼 수 있는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힘이 없으면 결국 억울하게 당하면서 살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오히려 그 모든 힘을 포기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가난한 자리에 내려가므로 이 땅의 모든 힘을 무력화하고 사랑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자리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힘을 숭상하면서 힘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여러분은 오히려 모든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계를 거슬려 예수의 평화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이제까지 여러분이 의존하였던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이제는 빈손 들고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모든 힘을 완전히 포기하신 예수님처럼 여러분도 이 땅의 모든 힘의 논리를 포기하고 빈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며, 그 십자가에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부활의 아침이 동터 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며 능력 있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가난하게 되신 종으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새기면서 이 땅의 모든 힘의 논리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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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모든 힘을 버리신 종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4월 16일 고난주일> 육성설교 모든 힘을 버리신 종 이사야서 53: 7-12 빌립보서 2: 1-11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런 모습은...
    Date2002.07.22 Views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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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4월 9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 사무엘하 5: 1- 3 갈라디아 6: 6- 9 성경에 시간을 뜻하는 용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Date2002.07.22 Views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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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말씀을 듣기 위해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4월 2일 사순절 넷째주일> 육성설교 말씀을 듣기 위해 사무엘 상 3:10-14 골로새서 1:9-10 오늘 읽어 드린 구약 말씀은 엘리가 사사로 있고, 그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던 때의 이야...
    Date2002.07.22 Views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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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성령의 열매 - 절제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3월 26일 사순절 셋째주일> 육성설교 성령의 열매 - 절제 여호수아서 7:22-26 고린도전서 9:24-27 오늘은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 절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제를 영어 성경에...
    Date2002.07.22 Views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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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성령의 열매 - 온유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3월 19일 사순절 둘째주일> 육성설교 성령의 열매 - 온유 시 편 37: 9-15 마태복음 11:28-30 오늘은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溫柔)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온...
    Date2002.07.22 Views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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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성령의 열매 - 충성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3월 12일 사순절 첫째주일> 육성설교 성령의 열매 - 충성 다니엘서 6: 1- 4 디모데후 2: 1- 7 오늘은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인 '충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개역성경에 충성...
    Date2002.07.22 Views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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