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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22 09:35

굴레를 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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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6월 25일 성령강림절 후 둘째주일>
   육성설교

굴레를 벗자

이사야서  61: 1- 3
 사도행전   3: 1-10

     

    오늘 읽어 드린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쳐준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있었으며, 평생 그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날마다 그를 성전 문 앞에 메어다 놓아주곤 하였고,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겨우겨우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런 그의 숙명적인 삶을 바꾸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가 짊어진 숙명의 굴레를 그대로 가지고 죽을 때까지 가도록 조금씩 도와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벌떡 일으켜 주자, 이제까지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숙명의 굴레가 깨어지면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숙명적인 굴레

    먼저 우리는 앉은뱅이와 그를 성전 문 앞에 메어다 주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에게 푼돈을 던져 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주어진 숙명 앞에서 어쩔 수 없다며 그 숙명의 굴레를 그대로 받아드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앉은뱅이는 선천성 장애자로 자기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고, 그는 한 번도 스스로 일어서 걷겠다는 생각을 갖지 못한 채 주어진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바램이 있다면 굶지 않고 그날그날의 끼니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눈에는 사람들이 모두 몇 푼의 돈을 던져주는 사람으로 보일 뿐 진정한 인간관계는 모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요즈음도 장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배려가 많이 부족한데, 하물며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장애자는 오히려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어 사람들에게 동정의 대상이 될 뿐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편견과 멸시를 뚫고 한 인간으로 선다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넘기 어려운 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그 모든 사회적 굴레를 숙명으로 받아드리면서 오로지 자기 연명을 위하여 돈을 구하는데 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구걸하는 앉은뱅이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거기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고, 그 숙명적 굴레를 쓴 채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이런 앉은뱅이를 매일 성전 문 앞에 메어다 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모르겠으나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려는 이웃이거나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들도 앉은뱅이의 숙명적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드리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정을 그에게 베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를 메어다 주는 일을 하므로 그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그 숙명의 굴레에 적응하도록 하여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고 조용히 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제사하러 올라가는 사람들도 그 앉은뱅이에게 동전 몇 푼 던져주는 것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계명을 지키는 충실한 교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을 드나들면서도 하나님께서 저 앉은뱅이를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저들이 믿는 신앙에는 현실을 뒤덮고 있는 숙명의 굴레를 벗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현실과 믿음의 세계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였습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 둘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하나님이 저 앉은뱅이를 고쳐주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거기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은 채 몇 백년을 살아왔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교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숙명의 굴레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어떤 능력도 없었고, 그저 율법주의에 매어 형식적인 제사만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아무 구원의 능력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에 불과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는 바로 그 성전종교의 실상을 그대로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굴레들

    이런 앉은뱅이의 현실은 바로 숙명론으로 요약되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고 적응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마귀가 뿌린 독소로 사람들을 마비시켜서, 현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숙명적인 것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실을 진리로 받아드리면서 이 진리를 벗어나는 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현실을 이념화하여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 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이 이념으로 묶어 놓습니다. 종교인들은 이런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거나 혹은 죗값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그 굴레 속에서 더욱 꽁꽁 묶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현실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체념하면서 그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1945년 해방되면서 남북으로 분단되어 이념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오늘 남북 전쟁을 치르면서 남북 합해서 550만명의 인명피해를 냈습니다. 이 전쟁 이후 남북 사이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담이 쌓이고 우리 속에는 증오심이 쌓였습니다. 통치자들은 이런 국민의 정서를 바탕으로 반공을 국시로 정하였고, 계속 이북 공산주의자들을 괴물로 몰아갔으며, 빨갱이는 무조건 때려잡을 상대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교회도 여기에 편승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이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무리들로 매도를 하였습니다. 이래저래 남북 간의 불신은 더욱 두터워지고 가로막은 담은 점점 더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이 점점 격화될수록 우리 속에 불안은 점점 늘어나고 군대와 군비는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군의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독재정권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숙명적으로 그 통치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드렸습니다. 이런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민족은 이념을 초월하여 하나될 수 있다고 부르짖은 사람들은 모두가 좌익으로 몰려 희생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민주화의 실현을 포기하고 체념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앉은뱅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정권이 업어다 놓은 그 자리에 앉아 몇 푼 던져주는 경제적 혜택에 만족하면서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을 던져버리고 비열하고 비겁한 소시민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악마성을 보면서 그것을 경계하고 그 굴레를 벗도록 이끌었어야 하는데, 반대로 경제성장을 축복하면서 돈벌레처럼 돈에만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을 끌어 모아 그들을 축복하고 더욱 경제성장에 매진하도록 독려하였을 뿐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굴레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고 구원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우지 못하였습니다. 앉은뱅이가 앉았던 성전종교와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종교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굴레를 벗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자유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대신에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길들여진 우리는 고 문익환목사님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였을 때 그를 비난하였으며, 임수경이나 박성희 같은 학생들이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을 정신나간 아이들이라고 혀를 찼습니다. 그들은 체제의 굴레를 벗어나 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의 미래를 바라보며 비상하였지만, 우리는 모두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북한을 우리의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우리의 주된 적국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민족을 완전하게 분열시키려는 반통일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드린 결과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말썽을 부리고 속을 썩인다고 해서 그 자식을 원수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속을 썩여도 자식을 원수요, 내가 무찔러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그 자식을 더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재산을 가지고 멀리 가서 다 쓰고 거지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그를 기다렸고, 돌아오자 그를 기쁨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은 그 동생을 그야말로 주적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가 돌아오자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달래면서 그 동생을 영접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북한이 탕자 같은 존재라면 우리는 그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같은 존재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탕자를 우리의 주적으로 규정하면서 돌아오기만 하면 쫓아버리겠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무서운 굴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렇게 무거운 숙명적 굴레를 벗지 못한 앉은뱅이 앞에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이 그냥 지나치거나 동전 몇 푼 던져주고 가지 않고, 멈추어 서서 그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처음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은과 금 말고 그 앉은뱅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은 이제까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없는 베드로와 요한은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마귀의 굴레 아래 놓인 모든 세계가 추구하는 것은 은과 금이 제일의 가치입니다. 그것만 있다면 그 굴레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좀 짓밟히더라도 개의치 않고 견뎌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경제가 성장하여 잘 살기만 하면 통일이 무슨 대수냐, 민주화가 안되고 독재정권 아래서 살더라도 그게 문제될 것 있냐, 통일되면 저 가난한 북한을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할텐데 그런 통일을 무엇 때문에 기다리느냐,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아니냐' 이것이 바로 앉은뱅이의 가치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기존 체제를 뛰어넘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한 놀라운 이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바라기는 했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이제 베드로와 요한이 이 기적을 현실 속에 이루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베드로는 이제 이 놀라운 기적을 선포하였습니다.

    기적은 현실로 나타나, 나면서 나이 들기까지 한번도 일어나 걷지 못한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를 통하여 마귀의 모든 계략을 깨트렸으며, 그가 우리에게 뒤집어 씌웠던 모든 죄와 죽음의 굴레를 깨트리셨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숙명적 굴레라고 생각되었던 모든 죄와 죽음이 벗겨지고 참 생명의 자유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생명의 진리를 깨달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 있게 이 앉은뱅이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죄 아래 갇힌 모든 자를 해방하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사 61:1-2

    이제까지 누구도 이루지 못한 해방과 자유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취하셨고, 이를 제자들로 온 땅에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은 없다고 외친 과학자들과 통치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그 체제에 순응하여 살았지만,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확신을 얻은 제자들이 나타나서 이런 체제를 완전히 뒤엎는 놀라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자 예루살렘은 온통 요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존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저들을 짓누르던 죄와 죽음을 숙명으로 알고 거기에 순응하였는데, 이제 그것은 극복될 수 있고, 참 생명의 새로운 세계가 그 앞에 열린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면서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초대교회는 날마다 왕성하게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기성체제는 더 이상 이 새로운 복음의 불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13일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에 참가한 남쪽의 주역들이 대개 크리스찬들이었습니다. 김대통령이 카톨릭 신자였고, 부인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회 장로였으며, 이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국정원장 임동원씨 역시 광림교회 권사였습니다. 이들이 이 회담에 참석하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결국 이들은 이제까지 높게 쌓아올렸던 남북 간의 담을 훌쩍 뛰어 넘어 기존의 모든 이념과 생각을 뒤엎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현실을 깨트리고 일어나 걷는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6 25 전쟁 50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존의 숙명론적 체제를 그대로 순응하며 무기력하게 따라왔던 잘못을 회개하고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이런 모든 관습과 체제와 이념을 뛰어넘어 생명의 넘치는 활력으로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야말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무기력하고 비겁한 제자였지만, 그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변화된 이후 놀라운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고, 담대하기 이를 데 없는 혁명적 투사가 되었습니다.

    지난 날 교회가 반공이념에 묶이고, 체제 순응적인 기관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가졌지만,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부활의 놀라운 생명을 받아서 변화되면, 교회야말로 이제까지 이 민족을 짓눌렀던 굴레를 벗기고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무거운 반통일적 이념과 체제의 굴레 아래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지내왔습니다. 이제는 그 굴레를 벗어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열린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세계로부터 오는 생명의 힘은 우리로 이 땅의 모든 굴레를 깨트리고 좀더 자유롭게 뛰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실현시키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제는 열린 마음과 열린 생각으로 이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향적인 생각으로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며,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앉은뱅이처럼 업어다 놓은 그 자리에 앉아서 몇 푼의 동전이나 구걸하는 희망이 없는 숙명론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헤아려 이 땅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시는 이 땅의 온갖 굴레 아래 스스로를 가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사회적 통념을 따라 진리를 저버리는 비겁한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참 자유한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어 이 사회를 비추고 이 땅의 모든 악마의 계략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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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4월 9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육성설교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 사무엘하 5: 1- 3 갈라디아 6: 6- 9 성경에 시간을 뜻하는 용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Date2002.07.22 Views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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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말씀을 듣기 위해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4월 2일 사순절 넷째주일> 육성설교 말씀을 듣기 위해 사무엘 상 3:10-14 골로새서 1:9-10 오늘 읽어 드린 구약 말씀은 엘리가 사사로 있고, 그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던 때의 이야...
    Date2002.07.22 Views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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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성령의 열매 - 절제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3월 26일 사순절 셋째주일> 육성설교 성령의 열매 - 절제 여호수아서 7:22-26 고린도전서 9:24-27 오늘은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 절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제를 영어 성경에...
    Date2002.07.22 Views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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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성령의 열매 - 온유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3월 19일 사순절 둘째주일> 육성설교 성령의 열매 - 온유 시 편 37: 9-15 마태복음 11:28-30 오늘은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溫柔)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온...
    Date2002.07.22 Views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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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성령의 열매 - 충성

    td { font-family : 굴림; font-size : 9pt; line-height:150%} <2000년 3월 12일 사순절 첫째주일> 육성설교 성령의 열매 - 충성 다니엘서 6: 1- 4 디모데후 2: 1- 7 오늘은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인 '충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개역성경에 충성...
    Date2002.07.22 Views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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