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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12:25

[김창제 글모음 47] 自由의 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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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年> 1927년 3월
 

自由의 道

(갈라디아서 五○一)


宇宙萬有는 다 自由를 求한다. 其中의 靈長이라는 人類는 勿論이다. 生物치고는 하나도 自由를 願치 아니하는 것이 없다. 그렇다. 其實은 다 聯絡關係 下에 매여있다. 一物도 떨어져서 제대로 사는 것은 없다. 보라, 遠하면 저 各 天軆로부터 近히는 蜂蟻 같은 昆蟲類라도 다 一定한 系統에 매여있고 一定한 連帶責任이 있다. 火星이나 土星이 太陽系를 떠나서 自由로 飛行치 못하고 一蜂 一蟻가 그 團體를 떠나서 제 各其 살지 못하는 것처럼 吾人 人類도 社會를 떠나서는 生活치 못한다.

卽 連帶責任 下에 매여있다. 自由는 絶對的이 아니다. 相對的이다. 一定한 法則과 一定한 範圍 안에서 無理한 拘束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 自由이다. 다시 말하면 그 法則을 違反하든지 그 範圍를 벗어날 지경이면 곧 制裁가 있고 束縛이 온다. 그런데 이 自由를 얻기 위하여는 最大의 犧牲과 最高의 代價를 바칠 것이다. 大自由를 爲하여 小自由를 바치고 永遠한 自由를 爲하여 一時的 自由를 바치는 것이다. 家族을 爲하여 自由를 바친 後에 家族大의 自由가 있다. 夫는 妻에게 妻는 夫에게 自由를 드린 後에 비로소 夫婦의 自由를 얻을 것이다. 社會를 爲하여 自由를 바친 者는 社會大의 自由를 얻고 國家를 爲하여 自由를 바친 者는 國家大의 自由를 얻고 世界를 爲하여 自由를 바친 者는 世界大의 自由를 얻을 것이다. 만일 어떤 蕩子와 같이 먼저 自己 自由만 얻으려고 父의 命을 拒逆하고 財産을 强取하여 가지고 遠離한다 하면 一時的 自由는 얻겠지마는 幾日이 못하여 乞人이 되고 말 것이다. 故로 우리가 참 自由를 얻고자 하면 먼저 絶對自由를 가지신 神께 우리 自由를 바치고 그 法則, 卽 眞理―命令을 絶對 服從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卽 宇宙大의 自由를 얻을 것이다. 이 自由는 肉軆의 機會를 삼는 自由가 아니라, 도리어 愛로써 彼此 奴隸가 되는 自由이다. 「兄弟들아, 너희에게 自由하게 하시려고 부르셨나니. 그러나 그 自由로써 肉軆의 機會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함으로 서로 종이 되라」(갈라디아書 五○一三)한 바울先生의 言이 참 自由를 軆驗한 바이다.

그런데 다만 自由라고 하고 보면 意味가 漠然하여 그 어떠한 人이 果然 自由의 人인가 하는 疑問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下에 具軆的으로 論述코자 한다.

大抵 吾人은 卽 肉, 心, 靈 三者로 構成한 것이다. 故로 自由를 論함에도 亦是 此 三 方面을 具擧할 수밖에 없다.

一, 物的 自由=生活의 自由이다. 吾人이 一次 生을 이 地球上에 寄한 以上에 夏葛冬裘와 渴飮飢食을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을 못한다 하면 卽 此를 人에게 依賴한다 하면, 이는 生活上 不自由의 人이다. 故로 人이 만일 獨立 自由의 人이 되려면 먼저 經濟的 獨立, 卽 生活의 自由를 얻어야 될 것이다. 吾人의 活動의 基礎가 여기 있는 것이다. 故로 바울 같은 使徒는 먼저 自食其力하는 生活의 獨立을 圖하였다. 그 生業으로는 帳幕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生活의 自由를 얻으려면 自手로 勞働하여 額에 汗을 流할 것은 勿論이어니와 繁雜한 生活에서 벗어나야 한다. 物質에 奴隸가 되지 말아야 한다. 高樓巨閣이 반드시 休養의 自由를 주는 것이 아니오, 錦衣玉食이 반드시 口軆의 自由를 주는 것이 아니오, 輕車肥馬가 반드시 出入의 自由를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도리어 우리 自由를 束縛하는 것이다. 佛蘭西 宗敎家 왕네氏의 簡易生活論에도 있는 바와 같이 行路하는 三人이 있는데, 一人은 跣足으로 步行하고, 一人은 着鞋로 徒步하고, 一人은 馬車로 驅去한다 하면 其中 가장 自由스러운 人이 誰이뇨! 勿論 跣足으로 徒步하는 人이 아니오, 또한 馬車로 驅去하는 人도 아니다. 其中 가장 自由스러운 者는 着鞋 徒步하는 人이라 하였다. 참 그러하다. 此人은 行止緩急을 任意로 할 것이다. 그리고 馬車上의 人이야말로 가장 不自由의 人임을 推知키 不難하다. 故로 吾人이 生活의 自由를 얻고자 하면 먼저 自作自給의 生計를 세워야 할 것과 同時에 繁雜한 生活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더구나 負債에 依하여 一時를 彌縫하며 假飾의 生活을 圖하는 者는 其實 奴隸되기를 自取함이라. 吾人의 自由를 束縛함이 債務보다 甚함이 없는 줄 안다. 다만 우리는 主께 對하여 큰 負債者이며 사랑함으로 서로 負債者인 것을 알아둘 것이다.

二, 心的 自由=精神의 自由이다. 우리가 物質生活에는 相對的 自由만이라도 얻기가 容易한 事가 아니다. 그러나 이 精神生活이야말로 實로 絶對無限의 自由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時間 空間을 超越하여 東西古今을 自由自在로 思索하며 觀感할 수 있다. 우리가 物質的으로는 비록 一毫라도 任意로 所有할 수가 없지만은 精神的으로는 實로 萬有를 所有할 수가 있지 아니하냐? 여기에는 金之李之所有證明書가 아무 權利가 없다. 그야말로 取之無禁하고 用之不竭이다. 그러나 이 精神的 自由라는 것도 求하는 道理가 있다. 事物을 公平히 判斷하는 頭腦와 宇宙를 統一하여 觀察하는 眼光을 가지어야 한다. 만일 不然하여 常識이 淺薄하고 迷信 妄想에 사로잡히거나 卑劣한 感情 慾望 等에 奴隸가 된 者는 到底히 精神生活의 自由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學問의 世界라든지 藝術의 世界라든지 等의 語句를 쓰지마는 이는 곧 우리의 精神世界가 얼마나 廣大한 것을 指함이다. 저렇듯 廣大한 世界를 所有하려면 亦是 그만큼 큰 準備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精神的 修養을 要함은 無論이다. 曰何學說, 曰何問題, 曰何主義라 하여, 가장 自由思想家인 듯 하게 보이는 者도 其實 그 學說, 그 主義에게 捕虜되여 一步도 自由로 進行치 못함을 알아야 한다. 참 自由思想家는 因襲과 習慣과 時代思潮까지 超脫하여야 한다. 이것들을 超脫하려는, 或은 하였다는 그 意識에서까지도 超脫하고야 참으로 自由思想家이다. 이 意味로 보아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自由思想家이다. 예수는 항상 常識的으로 每事를 判斷하고 處理하셨다. 그리하면서도 그 事物 그 思想에 捕捉되신 바는 없었다. 何時何事에든지 窘塞한 바 없고 綽々히 餘裕가 있었다. 實로 自由自在이었다. 吾人이 精神의 自由를 얻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模範함이 가장 單純하고 가장 捷徑일 줄 믿는다.

三, 靈的 自由이다. 萬有의 生命에는 그 程度의 高低가 있다. 卽 肉的 生命, 心的 生命, 靈的 生命의 階段으로 高低의 差別이 있다. 吾人의 生命을 此 三 方面으로 對立하여 볼 수도 있지마는 其實 吾人 生命의 進展하는 順序로 보면 卽 肉, 心, 靈 三 階段으로 上進하는 것이다. 主의 이른바 「人이 온 天下를 얻고도 그 生命을 잃으면 何益이 있으리오」 한 것도, 卽 靈的 生命을 指함이다. 故로 生命은 絶對的 價値가 있다 함이다. 이 靈的 生命이야말로 絶對的 價値가 있는 것이다. 世에 所謂 何々 至上主義라는 것을 多見하지만은 基督이야말로 生命至上主義者이다. 그런데 吾人은 이 靈的 生命이 있다는 것이 人類의 자랑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 靈的 生命을 發見하는 것만이 吾人의 能事가 아니다. 靈의 自由가 있어야 비로소 生命의 價値가 있다. 그러면 靈的 自由란 것은 무엇이냐? 肉과 慾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神과 直接 交通하여 神化하고 聖化한―罪惡의 束縛을 解脫한―靈活狀態이다. 이는 吾人이 間或 宗敎的 經驗으로 證明할 수 있는 것이다. 靈的 生命을 얻은 者는 곧 生死를 超脫한 者이다. 예수는 󰡔나는 生命을 棄할 權도 있고 도로 찾을 權도 있다󰡕 하였다. 人의 最高의 自由, 最終의 自由는 卽 靈的 自由이다. 이는 無限絶對의 自由요, 永遠無窮의 自由이다. 吾人은 敍述上 便宜를 因하여 上에 物的 自由와 心的 自由를 別擧하였거니와 其實은 이 靈的 自由를 어떤 者에게는 自然히 心的 自由와 物的 自由까지 오는 것이다. 卽 低級의 生命은 高級의 生命에 統一되며 支配되는 것이다. 觀하라. 靈的 自由를 가진 者―聖化한 人格者―로서 物的으로나 心的으로나 不自由한 生活을 하는 者가 있는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者 같으나 모든 것이 넉넉하고, 항상 근심하는 者 같으나 凡事에 기뻐하며, 逼迫을 當하는 者 같으나 자유롭다」는 것이다. 昔에 바울과 今에 샌더싱 같은 이가 곧 이러한 境涯에 入한 生活인가 한다.

이곳 예수 그리스도를 模範한 生活이다. 最高의 自由를 得한 生活이다. 靈으로써 物, 心을 統一한 全的 生命을 가진 者이다. 이것이야말로 不朽의 生命이다. 오직 信仰으로써 抱擁할 수 있고 到達할 수 있는 最高至上의 生命이다. 結局 吾人의 救拯이란 것은 곧 이 最高의 生命, 곧 最大의 自由를 얻는 것이다. 이 救拯을 받고자 하여 먼저 肉的 方面으로 入하는 者는 畢竟 最高의 生命에 이르기에 매우 迂回하는 者나 或은 落望하는 者가 많다. 現代人은 더구나 物的 方面에만 自由를 얻고자 專力하고 靈的 方面은 아주 除外하니, 이 無智함도 太甚치 아니하냐. 自由를 얻고자 焦燥하고 絶叫하는 現代人들. 아! 君等은 어찌하여 絶對無限의 自由를 가지신 神께 돌아가지 아니하고 한갓 円外에서 喧嘩하고 爭鬪만 是事하는가. 살찐 송아지와 金가락지를 豫備하고 晝夜로 그 아들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父親께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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